‘다리 밑 사연’을 낳기도 한 전통시대 교육의 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7-12 22:16:36
‘다리 밑 사연’을 낳기도 한 전통시대 교육의 장
<전문가 기고 - 김상렬의 인천문화유산 돋보기>
대성전
향교(鄕校)는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이념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한양에 성균관과 사부학당을, 지방의 부·목·군·현에 향교를 1개씩 설립했다. 또한 사학으로 서당과 서원(書院)이 있었는데 인천에는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있었다.
인천시지정유형문화재 제2호인 인천향교의 설립 시기는 인종 10년 전후시기와 태조 7년설 등이 구전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464년 최항이 쓴 ‘인천향교기’에 의하면 태종 6년(1406)에 부사 신개가 대성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406년 이전에 이미 향교가 설립됐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세조 12년(1466) 부사 민효열에 의해 1년에 걸친 개축공사가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 입은 화마의 피해를 숙종 27년(1701)에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행정구획 조정(1914)으로 부천군에 속하면서 부천향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인천부역확장(1940)으로 부평향교와 인천향교가 인천부에 속하게 되자 2개의 향교가 하나의 부내에 존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천향교가 철폐되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조직된 인천향교복구기성회의 노력으로 부평향교로부터 분리 복원되었으며 1957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지금의 원형을 갖추게 됐다.
향교의 건물배치를 이야기할 때 전학후묘(前學後廟) 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라는 말을 한다. 향교는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과 유학자들에게 예를 올리는 배향공간으로 나뉜다. 강학공간에는 교실 역할을 하는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설치되고 배향공간에는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 서무가 배치된다.
이외에도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 향교의 관리와 제향의식 등을 보조하기 위한 교직사(校直舍)가 있다. 그런데 공부하는 명륜당보다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평지에 향교가 세워질 경우에는 대성전이 앞(전묘후학)에 위치하고 구릉에 세울 때에는 대성전이 높은 곳(전학후묘)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향교에는 어떤 유학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까? 우선 유교의 창시자인 문선공(文宣公;공자)과 그의 제자 4성(四聖;공자의 수제자인 안자와 증자, 공자의 손자 자사, 그리고 맹자), 공문십철(孔門十哲;민손·염경·염옹·재여·단목사·염구·중유·언언·복상·전손사 등 중국 유학자 10명), 송묘육현(宋廟六賢;주돈이·정호·정이·주희·장재·소옹 등 송나라 때의 유학자 6명),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성혼·이이·조헌·김장생·김집·송준길·송시열·박세채 등 우리나라 유학자 18명) 등 49명이다.
대성전과 서무
그런데 중국 유학자 위패만 대성전에 들어가고 우리나라 유학자 18현의 위패는 동무와 서무에 나뉘어 모셔졌다. 이에 유림회는 문선공과 4성을 제외한 중국 유학자 위패를 훼매하고 동국십팔현의 위패를 대성전에 모시기로 결정, 현재 동무와 서무에는 동국십팔현의 위패 대신 영정을 걸어 놓았다.
그럼 향교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교사(校舍)의 설치·보수·유지 및 교관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등에 소요되는 향교의 유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나라에서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교노비라고도 함)를 공급했다. 우리 인천향교에는 학전 10결(結)과 학노비 20구(口)가 배정됐다. 또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이 파견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당초 종6품의 교수와 종9품의 훈도를 향교의 교관으로 파견하도록 법제화돼 있었다.
그러나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관으로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아 교관 충원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18세기 경에 이르면 아예 향교의 모든 교관을 없애는 원칙이 법제화됐다. 이후 학생들은 교육능력을 상실한 향교를 점차 멀리하고 서원·서당 등 사학기관을 선호했으며 향교는 문묘향사(文廟享祀)의 면모만을 유지하는 기관으로 변하고 말았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 불렀는데 조선왕조는 양인(養人)과 교화(敎化)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유교교육을 집행하였기에 원칙상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평민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했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교생이 구별됐다. 즉 양반신분과 서얼·평민신분을 액내(額內)교생과 액외(額外)교생으로 구별하여 호칭했고 기숙사의 호칭도 동재와 서재로 하여 각기 거처를 구분했다. 인천향교의 교생 정원은 70명이었다.
여기서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다리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 말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제월교)라 불리는 다리에서 연유된 것이다. 서원에는 유학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종들도 함께 살았는데 유생들이 그 종이나 마을 처녀와 정분이 나는 사태가 종종 빚어지곤 했다.
이들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유생들이 처녀와 짜고 일부러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라 해놓고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그 아이를 주운 것처럼 했다. 아이를 본가에 데려가서는 자기 아이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기르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는 전통시대 가족과 떨어져 유학을 오게 된 유생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명륜당
* 필자는 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으면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운영위원,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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