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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나비부인’과 개항기 인천의 인연

by 형과니 2023. 4. 16.

나비부인과 개항기 인천의 인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9-06 04:49:01

 

나비부인과 개항기 인천의 인연

손장원의 인천근대문화유산답사

 

베넷상사(광창양행, Bennet & Co.)는 영국인 월터베넷(Walter George Bennet)이 인천에서 설립·운영했던 상사로 그 시원은 광창양행(廣昌洋行)이다. 1902년에 설립된 광창양행은 당초 베넷이 일본인 에바라(?原修一郞)와 합작하여 만든 일영무역회사였지만 후에 그가 나머지 지분을 인수하여 베넷상사로 개칭하고 영업을 계속하였다. 설립당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30년대 초 베넷상사는 현재의 해안동 41번지(현 신포공영주차장)에 있었다.

 

베넷은 영국 인천영사관이 철수한 뒤 그 건물에 거주하며 영국 인천영사를 겸했던 사람이다. 그는 1897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글로버 하나와 결혼했다. 그의 부인인 글로버 하나는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글로버하우스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이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베넷상사(현 신포공영주차장) 일대(1933에 발간된 인천부사에 있는 항공사진에서 발췌하여 정리함)

 

글로버 하나의 아버지인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186124세의 나이에 글로버상회(Glover & Co.)를 설립했다. 그는 이 회사를 통해 막부와 번에 선박과 무기를 팔아 많은 돈을 벌었으며, 1864년에는 이화양행(Jardin Matheson Co.)의 대리인이 되기도 한다. 그가 일본에 판 배 중에는 그의 고향 에딘버러의 홀 럿셀 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조선침략에 투입되는 운요(雲揚)호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영국에 유학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글로버 덕에 서구문물을 접하게 된 이토는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를 만나 그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일본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왕성하게 사업을 벌여 많은 재산을 축적한 그는 사업력이 떨어지자 사업 대부분을 미쯔비시 회사에게 넘겨주고 그 회사의 고문이 되어 살았다. 말년에는 도쿄로 이사해서 살다가 191173세의 나이로 사망, 도쿄의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한편 그의 부인인 나비부인은 189952세에 사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무기상인인 그는 18633월 나사사키의 언덕 위에 자신의 집을 지었는데, 이 집이 바로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무대인 글로버하우스다. 이 집은 현재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일대는 글로버공원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어있다.

 

나비부인은 푸치니가 작곡한 23장의 오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기녀 나비부인이 미국 해군 장교 핀커튼(Pinkerton)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비극적 이야기로 1904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 중에서 나비부인만큼 널리 알려진 오페라도 없다. 세계적인 명성에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나비부인이 공연된 것은 1999925일 서울예술의 전당 공연이 처음이다. 이후 여러 차례의 공연이 있었으며, 금년에는 ‘2007수원화성국제연극제의 해외초청작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핀커튼이 바로 글로버하우스에 살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글로버이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글로버는 1866년 당시 이혼녀이던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했다. 글로버 부인은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하며, 나비부인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푸치니는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러한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인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 1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이다. 글로버 하나는 어머니인 나비부인이 50세였던 1897년 영국인 베넷과 글로버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베넷과의 사이에 22녀를 두었다. 그녀가 인천에서 태어난 장남을 일본 나가사키의 소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자녀들을 일본에서 교육시킨 것으로 보인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있는 글로버 하나의 묘비

 

그녀가 인천에 시집와서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베넷상사의 사택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녀가 베넷과 함께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현 파라다이스 호텔 터)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193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베넷이 언제, 어떻게 인천에 왔는지, 사망일자와 장소 등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있어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193411월에 발간된 삼천리 제6권 제11호에 실린 半島配置英米 等 7外交陣容에는 영국영사관 영사대판(領事代辨) Bennett. U. G.로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이름에 대해서도 자료가 보완되어야 한다. 1898년 당시 그가 홈링거 상사의 지배인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1901년에도 이 상사의 지배인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홈링거 상사(본점은 일본 나가사키 유럽인 거류지 소재) 인천지점이 개설된 189610월경에 인천에 온 것으로 보인다.

 

* 필자는 재능대학 인테리어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해반문화사랑회의 인천정체성 찾기 운동에 참여했고 문화재청이 지원한 근대문화유산 지킴이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랜 준비 끝에 다시 쓰는 인천 근대건축’(간향미디어랩)이란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