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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구도(球都)인천의 야구사는 한국 야구 100년

by 형과니 2023. 4. 17.

'구도(球都)인천의 야구사는 한국 야구 100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0-23 01:55:39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사는 한국 야구 100...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사는 한국 야구 100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전통의 야구 명문' 인천고와 한국 야구를 빛낸 숱한 스타를 배출한 '야구 명가 동산고'가 고교야구의 '양대산맥'을 형성했으며, 이후 '신흥 다크 호스' 제물포고까지 고교야구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경인기차통학생들로 구성된 한인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에서부터 현재의 인천 프로야구팀 SK와이번스까지 야구는 인천 시민과 오랜 세월 애환을 나눈 대표적인 스포츠다. 특히 SK는 올 시즌 한국시리즈에 직행, 시리즈 1차전을 앞둔 오늘까지 인천 야구는 하나의 파노라마를 형성하고 있다.

 

# 한국야구의 태동

 

 

일본이 웃터골(현 제물포고자리)에 세운 공설운동장.

대한야구협회가 한국야구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한국야구사'를 보면 한국에서 야구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서다. 그가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고, 이듬해인 1906년 독일어학교팀과 야구경기를 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라고 한국야구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야구 시작과 관련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앞선다는 증거는 많다.

 

1895년 개교한 인천영어야학회(인천고 전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가 당시 자신의 일기에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질레트보다 무려 6년을 앞서 인천에서는 야구를 즐겼다는 걸 알 수 있다.

 

# 인천의 자랑 한용단

 

 

19193·1 운동이후 문화통치를 실시한 일본이 인천 웃터골(현 제물포고자리)을 공설운동장으로 개설해 야구 경기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한용단(漢勇團)'은 이곳에서 경기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한용단이 일본인 야구팀과 경기를 펼칠 때면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리고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을 돋우어 응원했으며 지게를 세워놓고 경기를 구경하던 생선장수는 조갯살과 생선을 썩혔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다.

 

# 사회인 야구의 효시 '전인천군'

 

 

1954년 필리핀에서 열린 제1회 야구선수권대회의 유완식 선수.

 

인천야구 1세대를 이끈 김선웅선수.

해방 후 신탁통치로 인해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이때부턴 미군들과 야구시합을 벌였다. 인천 사회인야구를 대표했던 '전인천군' 역시, 인천지역에 주둔했던 미군 팀들과 경기를 치르며 두드러진 활약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전인천군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미군들이 건성으로 경기에 임했으나 몇차례 경기에서 전인천군에게 혼쭐이 나자 조직적인 훈련을 했으며 차후에는 미군사령부가 주최한 양팀간의 정기전이 치러졌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46년 자유신문사가 주최한 4대도시 대항야구대회가 해방후 첫 공식대회로 열렸다.

 

하지만 전인천군은 예상 외로 서울, 부산, 대구에 잇달아 패하며 3전 전패로 첫 대회에서 최하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7 대회에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인천야구의 위세를 떨쳤다.

 

아울러 그해 7월과 8월 전국지구대표야구쟁패전과 월계기 대회에서 잇단 우승을 포함해 한 해에 4개 대회 우승을 싹쓸이 하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전인천군의 멤버로는 인천야구 1세대를 풍미했던 김선웅, 장영식, 박현덕 등이며, 여기에 일본 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합류한 유완식까지 그야말로 요즘 말로 '드림팀'이었다.

 

# 슈퍼스타에서 비룡에 이르다

 

 

지난 5월 가졌던 이만수코치의 깜짝이벤트.

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은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지금의 SK 와이번스까지 다섯 번이나 팀이 바뀌었다. 프로야구 태동기엔 인천에 야구팀 없이 출발할뻔도 했고 그 이후에도 인천 연고팀은 수 많은 시련과 역경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늘 하위권을 맴도는 팀 성적과 연고 구단의 부실로 인한 잦은 팀 매각, 또 믿었던 팀의 배반으로 연고팀이 없어질 위기까지, 참으로 인천팬들은 힘들게 지역 야구를 지켜봐 왔다. 그만큼 지역팀의 한국 시리즈 우승은 인천 야구팬들의 숙원이었다.

 

첫 한국 시리즈 진출은 프로야구 출범 13년째인 1994년 태평양 돌핀스가 이루어냈다. 김홍집과 최창호, 정민태의 선발진에 마무리 정명원을 앞세워 정규리그에서 당당히 2위에 올랐으며,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연승으로 가볍게 제압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당시 LG'신바람 야구'에 밀려 4연패로 한국 시리즈 제패엔 실패했다.

 

 

정규리그 우승 시상식

1996년 인천 프로야구는 또다시 연고팀이 바뀌는 진통을 겪으며 현대 유니콘스가 자리한다. 이후 현대는 창단 3년째인 1998년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LG에 지난 94년의 패배를 설욕하며 인천 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는 2000년과 2003, 2004년까지 길지 않은 팀 역사속에서 4회 우승을 이룩하지만 2000년부터 인천 연고팀은 SK.

 

인천 야구는 신생구단 SK와 함께 부흥을 준비해 왔다. 국내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메이저급 야구장인 문학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SK200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현대와 맞붙지만 7차전 명승부끝에 34패로 시리즈를 내줬다.

 

하지만 SK는 올시즌 팬과 함께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스포테인먼트'를 실천, 팀 사상 최고 성적과 관중 동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팀 창단 7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직행, 한동안 침체돼 있던 지역 프로 야구는 물론 '구도(球都) 인천'의 명성을 다시 일으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