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노풍(鄭盧風)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2 11:18:19
단 한 줄의 기록으로 쓸쓸하게 남은 시인 정노풍(鄭盧風)
인천의 문학 예술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20년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이다. 이미 전회에 실린 고유섭, 진종혁과 마찬가지로 정노풍도 이 친목회의 멤버였다. 이 친목회에서는 당시 등사판 간행물 형식이었지만 문예물을 실은 회지를 발간했는데, 여기 글을 수록한 인물들이 “정노풍(鄭盧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爀),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鎭滿), 고일(高逸) 등”이라는 한 줄의 『인천시사』 기록 속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 정노풍은 일부 학자들의 연구 외에는, 인천에서든 우리 한국 문단에서든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 활동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표방한 절충주의 문학 노선 때문이었는지, 불상(不詳)한 행적 때문이었는지, 아무런 설명 없이 이렇게 필명 석 자만 덩그러니 시사에 쓰여 있는 것이다.
“이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문학적 습작 활동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우촌(秦雨村, 秦宗爀)의 주도 아래 『습작시대』가 만들어졌음은 이미 언급했거니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설가 엄흥섭(嚴興燮) 등 다수의 문인들이 여기 기고하고 있었다. 또한 이 무렵 신문기자이면서 문인이 되고자 한 김도인(金道仁)이 『월미(月尾)』라는 잡지를 의욕적으로 발행한 기록이 보이는가 하면, 30년대 후반에는 우봉준이 『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통해 박목월(朴木月), 박화목(朴和穆)과 같은 장래 우리나라 아동문학 및 시단의 거목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한 기록도 보인다. 이 시기에 기억할 만한 또 하나는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알려지는 현덕(玄德)의 등단이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남생이」는 그 무렵 인천 부둣가를 배경으로 뜨내기들의 생활을 그린 작품이었다.”
위의 글은 『인천시사』에서 인용한 내용인데, 최소한 정노풍은 1929년 2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집중적으로, 또 매우 왕성하게 시작(詩作)과 평론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1934년 무렵 다시 활동을 하는데도 어쩐 일인지 여기 기록은 그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자료의 부족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이때는 이미 인천을 떠나 활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 그가 인천을 떠나 경성에서 활동을 했다 해도 ‘인천 사람’이었거나 인천과 연고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기록이 되었어야 옳지 않을까.
이에 관해 확언(確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시사의 기록과 친구 고일(高逸)의 기록대로 분명 인천에서 서울로 학교를 다녔던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인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회원으로서 그들의 회지에 작품을 발표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의당 우리 인천문학사(仁川文學史)에 족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시사의 기자(記者)는 그저 이름 석자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 1월에 발간된 『삼천리』 제4호에 실린 논설 「장래 십년에 자랄 생명!!, 언론계, 교육계 등」에 보면 그는 이미 한국 유수의 문인들과 함께 시단(詩壇)과 평단(評壇)의 중추가 되어 있다.
“과거 10년 동안에 인구, 언론, 교육 등도 모든 것이 모다 놀납게 자라난 모양으로 조선의 문학도 그 환경 가지고도 이수(異數)의 발전을 보이고 잇다. 즉 13, 4년 전에 「무정(無情)」 「윤광호(尹光浩)」 등 장단편 소설이 춘원(春園)의 손으로 나와 비로소 묘사와 구상에 근대소설의 초석을 놋기 시작한 뒤부터 조선에는 순문예작가로 소설에 염상섭(廉想涉) 김동인(金東仁) 최서해(崔曙海) 현빙허(玄憑虛) 이기영(李箕永) 나도향(羅稻香) 최독견(崔獨鵑) 박영희(朴英熙) 김기진(金基鎭) 이성해(李星海) 주요섭 송영(宋影) 최승일(崔承一) 김영팔(金永八) 이종명(李鍾鳴) 홍벽초(洪碧初) 조포석(趙抱石) 등 기타 제씨와 시에 주요한(朱耀翰) 김안서(金岸曙) 이은상(李殷相) 김석송(金石松) 박팔양(朴八陽) 유적구(柳赤駒) 임화(林和) 이상화(李相和) 포석(抱石) 정노풍(鄭盧風) 박종화(朴鍾和) 김소월(金素月) 김창술(金昌述) 양무애(梁無涯) 한용운(韓龍雲) 오상순(吳相殉) 변수주(卞樹州) 김해강(金海剛) 파인 등 제씨와 시조에 육당 정인보(鄭寅晋) 요한 이병기(李秉岐) 권구현(權九玄) 조운(曹雲) 등 제씨와 극작가에 김운정(金運汀) 윤백남(尹白南) 김영보(金泳甫) 박승희(朴勝喜) 씨 등과 또 문예평론이 춘원 팔봉 회월 무애 이북만(李北滿) 윤기정(尹基鼎) 정노풍(鄭盧風) 등이 새벽 하늘의 성좌 모양으로 찬란하게 배출하야 만흔 건설을 보이고 잇다.”
역시 당시 잡지 『별건곤』 제25호에 실린 신년 논설 「십년간 조선의 변천」을 쓴 염상섭(廉尙燮)에 의
해서도 문단에서의 정노풍의 면모가 보인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이름 노(盧) 자가 노(蘆) 자로 기재되어 있다.
“기위(旣爲) 시에 관한 이약이가 낫기로 일괄하야 시단을 잠간 엿보려 하거니와 기타 지명(知名)의 시인으로서는 이은상(李殷相), 김소월(金素月), 김동환(金東煥), 박팔양(朴八陽) 등 제군이 배출하고 최근에 잇서서는 정노풍(鄭蘆風), 안석영(安夕影), 심훈(沈薰) 등 제군의 시작이 간헐적으로 지상에 산견(散見)하게 되엇슴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1931년 이후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했었다는 단서이다. 1931년 2월에 발간된 같은 잡지 『별건곤』의 지상고문란(誌上顧問欄)에 다음과 같이 실린 그에 대한 짤막한 동정 기사가 그 사실 말해 준다.
“일시 「민족적사회주의문학」의 제창자 정노풍 씨의 기후(其後) 휴식<안성 일문생(一間生)> 일설엔 「고문(高文)」시험 준비 중 우(又) 일설엔 모 도청(道廳)에 재직중.”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는지, 그의 행적이나 생몰년을 제대로 밝힌 기록 한 줄이 없는 것을 보면 모르긴 해도 이후에도 어딘가에서 은둔과 칩거가 계속되었던 것 같다. 희미하게 알려진 것은 고작 본명이 정철(鄭哲)이라는 것뿐.
▲ 동아일보에 실린 정노풍의 글
아무튼 동아일보의 기록으로는 정노풍은 1934년 활동을 재개해 1935년 3월 무렵까지 주로 평론 활동을 보인다. 이 시기를 통틀어 동아일보 등에 발표한 시만도 30편에 가깝고, 세익스피어 등의 번역시, 그리고 상당수의 평론 등이 있다. 그리고는 다시 그에 대한 기록이 깜깜한 암흑으로 변한다.
정노풍에 대한 이처럼 공소(空疎)한 기록을 메우는 것은 젊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더불어 인천과의 관계를 훤히 밝히는 일도 역시 그들의 임무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곧 여기 『인천시사』에서조차 한 줄의 대접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정노풍의 억울함에 대한 신원(伸寃)도 될 듯싶다.
▲ 삼천리 잡지표지
그런 날을 기다리며 1930년 5월 발행 『삼천리』잡지 제6호에 실렸던 그의 시 두 편을 여기에 옮겨 본다.
웃는 낫이 그리워
웃는 낫이 그리워
손녹이는 젊으니 웃는 얼골 그리워
바람찬 겨울밤엔 숫장사 하고 십소.
가슴타는 젊으니 웃는 얼골 그리워
뜨거운 녀름철엔 어름장사 하고 십소.
사랑하는 젊으니 웃는 얼골 그리워
꼿피인 봄날에는 꼿장사 하고 십소.
님생각
-모스크바의 K에게-
가지잘닌 양버들엔 푸른빗예고
갈바람에 우수수수 불려서도나
넝울잘닌 포도낭구 댕그런포긴
삼동치위 다지나고 봄바람불면
푸른이삭 알롱알롱 도다올르리
머나먼 북편나라 벌판을바라
떠나가신 우리님은 어대게신고
사시장천 어름깔닌 북국이오니
가을인들 어쩌오리 봄인들오리
집차저올 기약인들 헬수잇스리.
'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 이인석 (0) | 2023.04.25 |
---|---|
여배우 도금봉 (1) | 2023.04.25 |
배우 황정순 (0) | 2023.04.25 |
연극인 진우촌(秦雨村) (1) | 2023.04.25 |
다시 인천과 우현(又玄)을 생각해 본다 (1) | 2023.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