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인석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5 07:55:48
적막하게 인천을 떠난 시인 이인석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시인 이인석(李仁石, 1917~1979)에 대해서도 우리 인천은 잊고 있다. 그가 황해도 해주 출신이고 인천에서 활동한 시기가 대략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말에 이르는 10여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적막해졌을 것이고, 그와 인천과의 연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터여서 더욱 그렇게 된 것일까.
그렇다고 이처럼 그를 망각의 베일 저쪽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가 비록 여기서 나지 않았고, 또 여기서 삶을 마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인천에서 문학 활동을 했고, 처녀 시집 『사랑』을 인천에서 발간했으며, 더욱이 인천에서 예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인천지부(인천문총)’를 결성한 창립 멤버가 아닌가.
그가 걸었을 신포동 어느 길에나, 시내 어느 공원 한 구석의 작은 표지 하나에라도 그가 돌아와 우리 곁에 있게 해야 한다. 일생 동안에 단 몇 걸음만을 했어도 그곳에 시비(詩碑)를 세우고 문학비(文學碑)를 건립하는 다른 도시들의 문화 자존심과 문화 열정을 보라. 비석은 커녕 작은 표지 하나만이라도 세우겠다는 얼마 전 인천문인협회의 계획을 탈락시키고마는 인천시의 행정 양태라면….
“8·15 광복 후 5년 간, 다시 말해 광복된 해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는 해방된 열기에 들떠 있는 채 인천에서도 활발한 문학 활동이 시작되었다. <중략>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던 문인으로는 조수일(趙守逸)·이인석·조병화(趙炳華) 등이 있었다.”
“6·25 전쟁은 전국 어디에나 상처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지만, 특히 인천의 문화적 기반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9·15 수복 후 3개월 간 적 치하에서 숨어 살았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문화 예술 관계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전쟁 전에 인천시장을 역임했고, 『시와 산문』 동인지를 주도했던 표양문(表良文)이 문총구국대 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의학박사이며 향토사학자인 신태범(愼兌範)과 화가 우문국(禹文國)이 부대장을 맡았다. 뒤에 이경성(李慶成) 인천시립박물관장이 부대장이 되었고, 총무국장에 조병화, 선전국장에 이인석, 차장에 유희강(柳熙綱) 그리고 조수일·최성진(崔星鎭)·이민(李民)·최성연(崔聖淵)·박세림(朴世霖)·장인식(張仁植)·김차영(金次榮)·김응태(金應泰)·김양수(金良洙)·김영달(金泳達)·박윤섭(朴允燮)·최영섭(崔永燮)·백석두(白錫斗) 등이 회원이었다.
문총구국대에서 첫 번째로 개최한 행사는 ‘멸공문화인궐기대회’였다. 이때 오종식(吳宗植)·모윤숙(毛允淑)·김동리(金東里) 등 중앙 문인들이 개최 장소인 동방극장 무대에서 강연을 하였고 조지훈(趙芝薰)·장만영(張萬榮) 시인 등이 시 낭독을 하였다. 인천문총에 소속된 시인으로는 조병화와 이인석이 시를 읽었다.”
이 두 인용문들은 모두 『인천시사』에 쓰여 있는 것으로 이인석이 인천에서 활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 시사는 1·4 후퇴 때 다시 피난길에 올랐던 이인석이 재 수복 후 ‘방위군 소령 군복 차림으로 제일 먼저 돌아와서 옛 미국공보원 자리에 구국대 간판을 걸어놓고 장인식·박세림·한상억·고봉인(高鳳仁)·최성연 등과 함께 정상 업무를 시작했다’고도 전해 준다.
“그 무렵 인천의 문인들은 지역적인 사정상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 사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작품집을 낸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문총구국대가 기념행사 때마다 주로 행하는 시화전(詩畵展)과 문학강연회를 통해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갖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시화전이 있을 때마다 출품하는 시인은 이인석·한상억·조병화·최성연·표양문·고봉인·임진수(林眞樹)·김양수·김차영 등이었다.
서울 환도와 함께 수복해 온 조병화 시인이 제4시집인 『인간고도(人間孤島)』를 인천에서 출판했고, 이인석 시인이 첫 시집 『사랑』을 역시 인천에서 출판했다. 아직 어수선한 가운데 한참 복구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던 50년대를 마감할 무렵 조병화·정벽봉(鄭僻峰)·이흥우(李興雨)·이인석·임진수·윤부현(尹富鉉) 등이 모두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겨갔고 인천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 문인은 조수일·한상억·김양수·최병구 등이었다.
50년대 중반 인천에서 활동한 조병화·이인석 시인들을 인천 시단의 개척기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50년대 중반에서 말기까지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주한 정벽봉·이흥우·임진수·윤부현과 홍윤기(洪潤基)·낭승만(浪承萬) 등을 진취기의 시인들이라 하겠다.”
『인천시사』를 좀 더 인용해 본 것이다. 이인석에 대해서는 다행하게도 이렇게 얼마간의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가 월남해 인천에 정착했던 사연이나 서울로 가게 된 자세한 내력이 나와 있지는 않다. 모 인터넷 백과사전에 실린 그의 간략한 약력에도 “황해도 해주 출생. 해주고보(海州高普) 졸업. 8·15 광복 후에 월남하여 옛《경인일보》논설위원으로 있다가 상경, 《세계일보》문화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시작(詩作)에 진력하였다. 1955년 시집 『사랑』을 발간하고, 1957년 제21차 국제펜클럽회의에 한국 대표 단원으로 참석하였다.”는 정도이다.
더불어 “1959년 시 「탄피(彈皮)와 감초(甘草)」 등으로 자유문협상(自由文協賞)을 수상하였다. 1960년 이후 시극(詩劇)을 발표하기 시작,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고, 1961년 제2 시집 『종이집과 하늘』을 발간하였다. 제1시집 『사랑』에서는 애정과 서정의 세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제2시집 『종이집과 하늘』에서는 시인의 눈이 사회로 쏠려 현실 고발적인 내용으로 발전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여기에 기록된 ‘1959년 자유문협상 수상 기록’은 다른 사전에는 ‘1960년’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의 ‘1960년 4월, 시인 이인석, 시인 김규동(金奎東), 소설가 박연희(朴淵禧) 등이 함께 수상한 제2회 자유문학상(自由文學賞)’이라고 기록된 자료와는 실제로 다른 것인지도 밝혀야 할 것 같다.
《창비》의 기록에는 ‘평남도립도서관장으로 있다가 해방 후 월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아마 인천에 정착했던 것 같다. 문단 데뷔는 김광섭(金珖燮)의 추천에 의해 1948년 잡지 『백민(白民)』을 통해서였던 사실이 보이고, 1955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경력도 확인된다.
특히 1960년을 전후해 시극을 발표하면서 신동엽(申東曄) 시인과 자주 교류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동엽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한 민중시’와 앞에서 언급한 이인석의 ‘현실 고발적 내용의 시’라는 공통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0년 《창비》에서 출간된 『우짖는 새여, 태양이여』가 그의 유작 시집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1956년 3월 12일 동아일보 석간 ‘소년동아판’에 발표한 동시 「소년과 봄」을 소개한다.
봄맞이 한다고
개나리꽃은 저 먼저 피어났다.
노랑 옷차림 하고 돌담에 기대어 섰다.
들에 들에 민들레꽃 구름처럼 피어나고
산에 산에 진달래꽃 활활 타듯 붉어
멧새들 노래하고 시냇물 따라 하면
나물 캐는 소녀들 산에 들에 피어난다.
멧새 따라 시냇물 따라
꽃잎처럼 산에 들에 피어난다.
소년은 하늘을 바라본다.
눈은 구름을 따라 흘러갔다.
먼 먼 날의 푸른 꿈에 설레었다.
-「소년과 봄」전문
1974년 무렵이던가. 그러니까 이인석 시인이 별세하기 몇 년 전, 서울 종각 인근의 한국문협 사무실로 고 최병구 시인을 따라가 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저녁 늦은 인천행 기차표를 끊어 주던, 외모는 냉정해 보였으나 마음은 다정했던 인천 시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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