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고여 우문국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5 07:56:58
열정과 강직의 화가 고여 우문국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다행히 화가 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 1917~1998)에 대해서는 그 자료가 어느 정도 소상(昭詳)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그가 만년까지 인천을 떠나지 않았고 인천에서 운명했던 까닭에 그의 지인, 후학, 동문 후배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 그에 대한 증언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더불어 여식으로서는 장녀이자 소설가인 선덕(善德)이 그에 대한 기록과 자료들을 소수이나마 모아 보존해오고 있다는 이유도 들 수 있다.
약주잔으로써 동락(同樂) 이십 년의 시간이었지만, 그리고 늘 멀리 말석에서 본 바가 전부였지만, 그는 한마디로 열정적(熱情的)이었고 강직(剛直)했었다는 느낌이다. 특히 열정은 ‘그림과 술과 동지(同志)’에 대해서 그랬고, 강직함은 ‘부정과 무례와 천박’에 대해서였다. 한마디 과장 없이 예를 들어도, 목로에 선 허름한 술 한 잔일 망정 그는 ‘정열에 비례해 절대 예(禮)와 서(序)’에도 어긋남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해 말한다. 처신의 값없음이나 비굴 같은 행위는 물론 그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어쩌면 그를 무슨 고리타분한 한 유학자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절대 그렇지가 않다. 그가 신조로 삼은 것은 일상(日常)에서나 주연(酒宴)의 자리에서나 매양, ‘어그러지지 않는 한 가지 자세’,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경계한 것은 생활에서의 객기(客氣) 따위였지, 공맹(孔孟)의 예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시대 나름대로 리버럴리스트요, 다소 수줍은 로맨티스트였다. 항시 낭만을 즐기고 그것을 표현하기 좋아했다.
그의 인품에 관해서는 그와 아주 가까웠던 평생 동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이 1955년 어느 지면에 쓴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길지만 거의 전문의 길이를 옮긴다.
“내가 우 선생과 서로 알게 된 것은 벌써 17년 전 다 같이 역려(逆旅)에 시달린 이국의 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때 분명히 목을 축이기 위하여 과일즙을 구하러 나온 길에서 해후했다. 우 선생은 23세의 약관으
로 큰 눈이 바위 밑의 등불처럼 광채가 번득이는 재기 예발(銳發)해 보이는 미남이었고, 그때에도 틈만 있으면 사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꽃을 많이 사생하였다.
동서로 표랑하는 젊은 나그네의 행장 속에는 언제나 사생첩과 파스텔, 수채 부스러기가 반드시 들어 있었다. 나도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 하는 의욕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이다. 우 선생과 우호가 점점 깊어진 것은 같이 가난하고, 같이 무능하고, 같이 평범하고, 같이 외롭고, 같이 거짓이 없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오직 담수 같은 덤덤한 우정을 가져 왔을 뿐이다. 우 선생은 친구에 대한 의리를 소중히 하는 호쾌한 기개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늘어진 천품(天稟)을 가졌다. 우 선생 자신도 자기의 소걸음에 비겨서 우보와 의미가 통하는 호를 갖고 싶다고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도 있거니와 어떠한 급박한 일에 부닥쳐도 더욱 침착하고 태연해진다. 아직까지 우 선생이 당황해 하는 혹은, 격노하는 예를 본적이 없다.
술은 매양 호음(豪飮)하는 편이어서 음중선(飮中仙)에 가깝다. 취하기 전에도 별로 말이 없거니와 취한 뒤에도 역시 말이 적다. 그러나 호방한 기개는 어디서나 좌중을 휩쓸곤 한다. 이취(泥醉)할 지경에 이르면 어디선지 평소에 찾아볼 수 없는 황소고집이 나온다. 또 용맹도 나온다. 이럴 때에는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거리를 헤맨 적도 있다.
애음(愛飮)하는 탓으로 지교들 사이에 그저 막걸리처럼 텁텁하기만 할 것으로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칭찬과 예의에 대한 깊은 교양을 갖고 있다.”
고여는 해주 출생이지만 검여는 순전한 인천 토박이다. 고여는 21세 나던 1937년에 중국 상하이로 유학했는데, 검여는 1939년에 금석문 공부를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먼저 갔다가 1943년 다시 상하이로 와 상하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희강의 글 내용대로 둘의 ‘해후’는 아마 이 시기,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는 1946년 함께 귀국한 후로 평생 동지가 되는 것이다.
“1946년 5월 중국 상해에서 검여 류희강 씨와 10년 만에 귀국한 나는 고향인 38 이북의 해주에 갈 수가 없어 우선 서곶 시천동에 있는 검여 자택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 둘은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유람 겸 서울과 인천 등지를 돌아보던 중 현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있던 시립 우리 예술관을 찾게 되었다.
영국 영사관이었던 이 서구식 단층 건물은 우거진 노목의 숲이 주위를 둘러싸고 아담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옥내에는 상설화랑(常設畵廊)과 분야별로 연구실이 있는 듯 음악 연구실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 나왔다.
바다로 면한 테라스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원탁들이 놓여 있어 그곳에 앉으니 바로 밑에 있는 어항(漁港)에서 새우젓과 생선 비린내 같은 것들이 바닷바람에 실려와 항도(港都)의 풍취를 느낄 수 있었고 노무자들이 떠드는 잡다한 소음은 활기찬 부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검푸른 월미도의 녹음을 배경으로 두서너 개의 붉은 돛을 단 범선들의 입출항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인 듯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공업도시로만 알았던 인천에 서울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런 문화 시설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감명 깊은 인상을 남겼고 만일 끝내 38선이 뚫리지 않는다면 내가 정착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 마음에 새겨두게 되었다.”
1984년 4월에 발간된 잡지 『인천예총』에 실린 우문국의 「나와 문총 시절」이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그가 인천에 정주하게 된 이유는 결국 검여와의 만남, 그리고 또 하나 옛 영국 영사관 건물인 ‘시립예술관’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천에 정착한 우문국 화백은 곧바로 인천 문화, 예술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다. 귀국하던 해 12월, “인천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인 <인천미술인 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하면서 동시에 “<인천미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 회원은 서양화에 박응창(朴應昌)·김학수(金學洙)·우문국·김찬희(金燦熙)·이명구(李明久)·윤기영(尹岐泳)·한봉덕(韓奉德), 서예에 류희강·박세림(朴世霖)·장인식(張仁植), 미술평론에 이경성(李慶成) 등이다. 이 단체들이 해방 후 인천 화단을 형성하는 모체였다.
이어 “1947년 서울에서 예술인들이 단합하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을 시발로 인천지역에서도 <인천예술인협회>가 창립되었다. 문학·음악·미술인들이 주동이 된 이 단체의 미술 분야 창립 멤버는 서양화에 김학수·우문국, 서예에 류희강·박세림·장인식, 미술평론에 이경성 등이다. 이 모임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이를 모태로 <문총>의 산하 단체로서 1950년 6월에 문총 인천지부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발족 10여 일 만에 6·25가 터져 활동이 중단되었다. 전시중 이 단체는 <인천문총구국대>라는 명칭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중략> 일부 미술인들은 종군 화가로서 국가 비상시 동원령에 응하여 전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인천 화단을 지키며 그 험난한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로는 김찬희·김학수·윤기영·김진명(金鎭明)·이병태(李炳泰)·우문국·이명구 등이 있다.”
이처럼 『인천시사』의 기록은 초기 인천 화단에서의 그의 분망한 족적을 밝혀 준다. 그 후 고여는 1955년 초대 인천문화원장을 거쳐 1962년 인천박물관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시내 몇몇 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서, 또 더 뒤에는 국민대학 미술강사로서 후진 양성에 진력하기도 한다.
“고여 우문국은 한 마디로 말하여 인천 미술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40년이나 되는 기간을 곁눈 팔지 않고 그는 인천 미술의 중심축을 지켜왔다. 저 해방 공간과 6·25 전란의 질곡 시대에도, 50년대, 60년대의 삭막한 폐허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변혁기에도 한 사람의 은둔자로서 그는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비단 화가로서의 창작 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 관계 활동의 조직자로서, 문화 행정가로서, 집필자로서도 폭 넓은 활동 영역을 펼쳐 왔다. 그를 일컬어 ‘인천 예술인 규합의 산파역’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술평론가 김인환(金仁煥)의 말대로 그는 진정 우리 인천 화단의 중심이었고, 인천 예술계의 초석이었다. 그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이제 고여가 간 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년 10주기에는 비(碑)든, 표지(標識)든, 우리 인천 사람들이 그를 기려 새길 수 있는 무슨 상징 하나라도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오늘 비록 그의 작품이 한국 화단의 중심에 있지 않고, 그의 성명(聲名)이 두루 인구(人口)에 미치지 않는다 해도, 하다못해 기념전 하나라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기획해야 할 주체는 우리 인천이고 인천시민이다.
“고여에게는 ‘우탄트’라는 닉네임이 붙여진 시절이 있었는데 우탄트는 한때 UN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시다. 성이 우 씨인 데다가 외모에서 그와 닮은 부분이 있다고 해서 고여의 애칭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우탄트 고여는 인천의 도심지를 벗어나 죽림칠현(竹林七賢) 같은 은자 생활을 즐기기도 했었다. 황해 바다의 망망한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송도 언덕배기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혼자 단출한 삶을 살았다. 그야말로 속간의 번잡을 털어 버리고 유유자적하는 생활이었다.
그 언덕의 경사면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집을 찾을 때마다. 필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상기하곤 했었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손님, 즉 주선(酒仙)들이 꽤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상억, 김길봉 등이 주요 단골 멤버로서 항상 주변에 있었다. 한바탕 술자리를 벌이고 담소하며 바라보는 서해의 낙
조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제 환락 도시로서 급속하게 변모해 버린 송도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 시절의 어설프나마 정겨웠던 낭만을 찾을 수 없다. 그 후 고여는 송도 생활을 청산하고 강화 섬으로 더 은밀하게 자리를 옮겨 전원생활을 즐긴다.”
그 시절, 이따금 송도 행렬의 맨 끝에 서서 뒤따라가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 김인환의 글로써 추모를 대신하며, 코허리 시큰한 느낌 속에서 말미를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