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함효영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5 08:00:00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문인 함효영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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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는 초기 인천 문단의 뿌리였던 『시와 산문』동인의 주요 멤버 중 한 명인 함효영(咸孝英)을 소개한다. 함효영이 누구인가. 『인천시사』 문화예술편에 이름 석 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시인이었는지 소설가였는지, 작품은 혹 남아 있는지, 두루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일설에는 유명한 홍난파 작곡의 가곡 「사공의 노래」를 1932년 함효영이 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진위 여부도 몹시 궁금하다.
더불어 『인천시사』 정치편에는 그가 인천 갑 선거구에서 곽상훈, 양제박 등과 함께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던 기록과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재곤 등과 역시 인천 갑 선거구에 출마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그 역시도 중도에서 문학 활동을 접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었음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그의 출생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또 생몰년은 언제인지, 또 인천에는 언제 이주했는지 하는 따위의 정보를 알아낼 길이 없다. 『인천시사』 ‘인천의 발자취’ 편에 “1947년 3월 황해회인천지부가 인천시공관에서 결성대회를 개최(당시 지부장에 함효영이 선출됨)한 것을 발판으로, 1966년 인천지구 황해도민회로 개칭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기록으로 그가 황해도 출신임을 알 수 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27년 10월 동아일보 황주(黃州)지국 기자로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혹 황해도 황주가 연고지가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 함효영 소설
근래 시내의 대학 연구소들이나 지역 언론사, 그리고 몇몇 사설 연구소에서 ‘인천학’, ‘인천의 정체성 연구’ 등이 활발한데 실제 이런 인물들의 업적이나 행적을 밝혀 정리한 결과물은 매우 드물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조선중앙일보 등 몇몇 기록 자료에 그의 작품인 시와 콩트, 그리고 단편소설 등속이 남아 있고, 아주 간략하게나마 그가 활동했던 행적이 드러나 있다.
먼저 그의 문인으로서의 행적이다. 1934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일본 동경에서 문인 활동을 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달에 재일본 동경의 한인 문인들이 조선문인사를 창립하다. 조선문인사는 월간 문예지로서 『조선문인』을 발간키로 결의하였는바 조선문인사 소속 문인은 다음과 같다. 신행연(辛行然), 윤복진(尹福鎭), 김동진(金東進), 주태도(朱泰道), 이파촌(李巴村). 함효영(咸孝英), 김훤(金萱), 신호균(申浩均) 유치진(柳致眞), 남석용(南夕鏞), 마해송(馬海松), 임남산(林南山), 변성열(邊成烈), 홍선(洪宣).”
이 기사에서 이 무렵 함효영이 일본에 동경에 체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유학을 간 것이라면 언제, 무슨 대학, 무슨 학과에 진학했는지 또한 밝혀지지 않은 채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유치진이나 마해송 등 우리 문단의 중요 인물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함효영도 상당한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함효영은 시와 소설 두 분야 모두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일보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던 기록이 있는 것이다. 이 신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으로 1933년에 10월 분재 발표된 단편 「土幕(토막)의 夜景(야경)」과 1936년에 발표한 시 「西海岸(서해안)의 밤」이 있다. 그 외에도 1935년에 발표한 콩트 「불 끄는 꿈」이 있고, 한국 대표 노동시의 하나인 「여직공의 죽음」과 「三千萬(삼천만) 앞에 다시 盟誓(맹세)하여라」같은 작품이 알려져 있다. 그의 시 「西海岸의 밤」 전문을 게재해 본다.
거뜬한 7月의 太陽(태양)을 전송한 뒤
파도를 부여안고 몸부림하던
▲ 함효영 시
붉은 落照(낙조)마저 황혼 따라 저물고
물 위에 떠놀던 갈매기들도
하나 둘 어디론지 다 날아간 뒤
멀고 아득한
水平線(수평선) 위로는
고요한 어둠이 巡禮(순례)를 오네
석양이 떠나간 뒤 어둠과 함께
찌푸린 하늘……
머지않아 비가 오려는지?
별 하나 안 보이네……
내 지금 외로이 지난 일 생각하며
밤의 海岸(해안)을 거니노니
이따금 스치는 갈잎소리와 함께
戀人(연인)의 귓속말같이
나의 憂鬱(우울)한 心靈(심령)을
흔들어 주네……
밤마다 달이 밝으면
이곳을 거니는 이
한두 사람이 아니더니……
캄캄한 오늘밤은 아무도 안 오네
저 멀리 天幕村(천막촌)에서
그리 서투룹지 않은 독창소리만
바다 건너 들리어 오네―
어느 젊은 여인의 멜로디인지?
寂寞(적막)에서 얻은 崇高(숭고)한 詩想(시상)만을
부질없이 깨쳐 버리네
(7월 16일 몽금포에서)
이 시의 말미에는 황해도 ‘몽금포’에서라는 메모가 붙어 있는데 이때는 이미 동경 생활이 끝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 1936년 무렵 서울 남대문에서 발행되던 『東洋實業』(동양실업)이란 잡지이다. 이 잡지는 그가 발행인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시를 발표할 때는 이미 귀국한 후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고, 이 시기에는 또 그의 거처가 서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잡지는 일경(日警)에 의해 출판 불허가 조치를 당하기도 한다. 「조선출판경찰월보」 제76∼99호에 게재된 내용에 따르면 1936년 11월 28일자로 『東洋實業』 第1卷(제1권) 第6號(제6호)에 게재된 “雪中梅(설중매)와 興哲(흥철)의 사랑을 담은 「長恨(장한)의 月尾島(월미도)」”라는 작품이 온건치 못하다는 이유로 일부 장면 삭제 조치를 당하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 이후 몇 년간 이 잡지는 다시 발간 허가를 받는다.
잡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가 발행인으로 있는 이 잡지의 제목이 무슨 회사 사보나 경제 잡지 같은데 일본 동경의 동양실업사(東洋實業社)에서 발간하던 『東洋實業』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확인해 볼 사항이다. 더불어 이 잡지 전권은 물론 그 「長恨의 月尾島」같은 작품을 찾아내 독자들 앞에 내보이는 일도 우리 인천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함효영은 언제, 무슨 이유로, 인천에 오게 됐는지 모른다. 표양문과는 달리 추측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인천 쪽 기록도 시사에 나타난 문학 활동에 관한 짧은 기사, 정치 활동에 관한 몇 마디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 중 ‘인천에 대학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은 대중일보 1949년 9월 22일자에 실려 전한다.
▲ 잡지 동양실업 내용 삭제 통고문제
“태동하는 민립대학은 30만 시민의 중망을 지니고 착착 개설 목표점에 매진을 거듭하고 있는데 동 대학 기성회에서는 어제 역원 연석회의를 상오 11시경부터 시장실에서 개최하고 재단 조성의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는 한편, 발기인 포섭 방침으로 동회별·지청별로 분과위원회를 설치키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종래의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재정 확보에 있어서는 소위 유지 층에 전적 의존 관념을 포기하고 가장 정확성이 있는 직장별 재정위원 확충을 기도하여 거시적으로 대학 창립을 추진할 것이며 명망 인사 및 교육 관계자들을 고문·참여 등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다. 그리고 각 부서의 책임자 및 증선을 다음과 같이 선임하였다 한다.
기획국장 김원규, 위원 금두영, 금유방, 김철수, 홍성학, 사무국장 정수일, 선전국장 함효영, 차장 김병욱, 위원 이순희, 한청선전부장, 재정위원회 차장 김철수, 교섭위원장 김호림, 차장 김일구, 위원 박경용, 하상훈, 박주동, 김병년, 박용한.”
함효영 그는 누구인가. 그에 관해 남겨진 숱한 공백을 찾아 메워야 한다.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최소한 우리 인천에서나마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루를 살았다 해도 그는 인천에서 활동했던 인천사람이고, 인천의 예술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함효영의 시와 본문 또는 인용문 가운데 한자(漢字)를 한글로 병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