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달주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20 00:20:08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인천 연고 화가, 이달주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이달주(귀로)
화가 이달주(李達周, 1920~1962)에 대해서도 누차 옹색하게 중복되는 『인천시사』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시사에도 단 두 군데뿐인데, 그것도 초창기 인천 화단(畵壇) 결성기에 잠시 몸담았던 단체의 명단 속에서다.
“미술인들을 총괄하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의 단체로서 <대한미술협회>(약칭 <대한미협>) 인천지부가 결성된 것은 1952년이었다. 김영건(金永健), 박응창(朴應昌), 윤기영(尹岐泳), 최석재(崔錫在), 박흥만(朴興萬), 장선백(張善栢), 류희강(柳熙綱), 박세림(朴世霖), 장인식(張仁植), 이경성(李慶成) 등이 합류하여 회원전을 갖기도 했었다.
중앙 화단에서의 회원 단체 양분화 사태는 인천 화단에까지 어김없이 파장을 몰고 왔다. <대한미협>에 반발하는 일부 미술인들이 별도로 <자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여기 맞섰는데 회원으로는 김기택(金基澤), 안현주(安賢周), 이달주, 이일(李一), 한봉덕(韓奉德) 등이 가세하고 있다. 정부의 예술 단체 일원화 방침에 따라 앞의 단체들은 1954년 <인천미술협회>(1961년에 <한국미술협회 인천지부>로 개칭)로 통합되었는데 새로 영입된 회원으로는 박영성(朴瑛星), 황추(黃秋) 등이 있다.”
▲ 이달주(바다)
“인천 화단에서 활동한 화가들로서는 이 지역 출신이거나 적어도 전적으로 생활 기반을 인천에 둔 화가들 외에 외지에서 일시 유입된 인사들도 있었다. 이달주, 임직순(任直淳), 정상화(鄭相和), 황용엽(黃用燁), 조용익(趙容翊), 김종휘(金鍾輝) 등이 그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거의가 교직에 종사하면서 직장 관계로 머물다가 떠난 케이스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지난주 임직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달주 역시 인천의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서울로 옮겨 갔는데, 그가 인천에 머문 시기는 대략 1950년대 초중반에서 말, 혹은 1960년대 초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직순은 인천여고에 재직했던 것으로 확인이 되는 반면, 이달주는 학교조차도 확인할 수가 없다. 이처럼 『인천시사』에 이름은 보이지만 임직순이나 이달주 모두 인천에서 펼친 활동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감감한 것이 실정이다.
▲ 이달주(병아리)
이달주는 황해도 연백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도쿄미술대학에 입학해 1943년에 졸업하는데, 졸업 후 아마 고향 쪽에 돌아와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기록에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 황해도 피난민이 많이 모여 있던 인천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천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이 나타나 있는 신문 자료로는 1948년 12월 26일자 서울신문이 있다. 12월 27, 28일 양일간에 있었던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초청된 그 당시 500명의 각계 문화 인사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달주 화백은 1959년 10월 제8회 국전에서 서양화 작품 「귀로」로써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다. 이때가 인천 체재 기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어 1960년에도 연달아 특선을 차지한 이달주는 1962년 국전 심사위원이 되는데 아깝게도 그만 그해에 뇌일혈로 사망한다. 김흥수, 도상봉, 류경채 등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이 1960년대에 이르러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활짝 펼쳤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달주작품('샘터'1958년작)
1940, 50년대 어려웠던 시기를 살다가 활짝 자신의 예술 세계를 꽃피우지도 못하고 요절한 작가 이달주. 짧은 생애에 남긴 작품도 불과 15편 정도라는 이달주. 그는 생전에는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못했다. 타계 2년 후 유작전을 연 후 2004년 다시 40년 만에 서울 가나포름스페이스에서 기획한 ‘20세기 한국 미술의 힘’ 시리즈 두 번째 기획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그때, 그의 화풍에 대해, 작품 세계에 대해 모 주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이달주는 ‘한국의 모딜리아니’ 혹은 ‘풍물시인’으로 비유된다. 정감 넘치고도 우수 어린 서민적 풍정을, 마치 모딜리아니 작품의 여인들처럼 긴 목을 한 여인의 모습에 담은 작품의 특징 때문이다.”
목이 길쭉하고 우수어린 여성상. 그것은 이 요절 화가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해 그린 자신이 초상화가 아니었는지…. 그밖에 이달주의 그림에는 굴비나 게와 새우 등이 등장하는데 출생지 황해도 연백과 후일 인천에서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이런 향토성 짙은 소재를 즐겨 택하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그린 정물화, 풍경화는 이런 향토 소재를 통해 대상을 길게 변형해 “두터운 마티에르로 표현함으로써 애틋한 서정적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 때문에 동시대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이달주작품(게와새우)
죽기 1년 전 『문원』에 발표한 수필에서 그는 “지워 버리고 또 그려 보고 생각하고, 저 고개 너머엔 무언가 바라던 것이 있겠지. (…)좇다가 지쳐서 허공으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관심치 않을게다.”라고 썼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된 글이다. 중요(中夭)의 화가 이달주의 예술적 고뇌와 고독이 쓸쓸하게 읽힌다.
화가 이달주. 그가 살았던 인천이 그의 예술에 어떤 영양(營養)과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 잠시 머물렀든 스쳐지나갔든 인천에서의 그의 생활과 예술을 밝혀내는 일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정신 사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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