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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선원면 이야기

by 형과니 2023. 5. 25.

선원면 이야기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4-28 11:24:17


선원면 이야기


안전하리라던 강화도에 오랑캐군이 급기야 들이닥쳤다. 누군가가 말했다. “대감, 어서 피하셔야지요.” 그러나 대답은 “대신인 내가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면서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고 남문 화약더미에 올라갔다. 평소 담배를 몰랐다. 그런데도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겠으니 불을 가져 오라고 하여 화약상자에 불을 붙이고는 한사코 함께 죽겠다는 사람들과 최후를 맞았다. 문루가 폭발, 흩어지느라 보이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강화도 함락과 함께 순절한 김상용의 최후 모습이다. 그는 병자호란때 인조 임금에 앞서 강화도에 들어갔다. 왕실의 위패와 비빈들을 시종하면서였다. 그러나 고려때 몽골과는 달리 청군은 바다를 건너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의 장열한 최후에는 13세의 어린 손자도 함께 했다. 하인에게 데려가라고 했으나 할아버지의 옷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아 조손이 함께 폭사했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임진왜란때 강화도 선원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호를 仙源(선원)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강화읍에는 그의 순의비가 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비면에서 땀이 흘러내린다고 한다. 충신의 나라걱정이 지금껏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원면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가 있다. 그가 순사할 때 신발 한짝이 날아가 떨어진 자리라고 전한다.

한편 친제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모시며 끝까지 항복에 반대한 척화파의 거두였으니, 형제의 충절은 후세에 귀감이 된다. 그는 심양에 끌려가면서 시조 한수를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원래 강화제일의 사찰 선원사가 있어 禪源(선원)이었으나 선원 김상용으로 인해 仙源(선원)으로 개칭되었다는 선원면-지금 친환경농업에 초점을 맞춘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이 한창이다. 2007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3년차인 이 사업은 5개 마을을 대상으로 사업비 67억원을 들여 추진하게 되는데, 현재 80%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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