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30) 월미도

by 형과니 2023. 6. 1.

(30) 월미도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8-17 22:21:11

 

인천재발견-월미도

 

인천을 알려면 월미도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월미도는 풍운 가득했던 근대 인천 역사의 중심 무대로, 지난 120여 년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격동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낸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월미도는 인천 사람 누구에게나 추억과 사연이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이지 월미도의 역사는 간추리기에도 숨이 차다. 어을미도(於乙味島)로 불리던 이름이 18세기 초부터 엉뚱하게도 月尾라는 지극히 요염한 이름을 가지게 된 내력에서부터, 임금이 거둥(擧動)할 때 임시로 머무는 행궁(行宮)에 대한 기록이나, 병인양요 때 불란서 해군이 저들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섬이라 불렀던 사연,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의 기지요, 임오군란으로 쫓긴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가 도망쳐와 마른 목을 축였다는 섬 동쪽 화방우물의 내력, 개항 이후 러·일 등 열강들이 눈독을 들이던 요충지로서의 운명, 러일해전의 현장, 그 후 다시 일제가 세계대전을 획책하면서 군사 기지화의 길을 걷고 6·25 후에는 미군 기지로, 그리고 근래까지 한국 해군의 기지였던,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여기에 다 옮기기도 어렵다.

 

물론 평화로운 시절이 있기는 했었다. 일제의 의해서였지만 월미도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근 20년 동안 우리나라 최고의 유원지로 명성을 날렸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데운 조탕(潮湯)과 해수풀장, 그리고 요정 용궁각(龍宮閣)과 빈()호텔 같은 시설은 당시 원산 송도나 부산 해운대를 제치고 조선 최고의 위락 시설로서 국내외 한량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 세대가 월미도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5587일 신흥초등학교 교정에서 있었던 적성감시위원단(敵性監視委員團)축출인천시민대회가 계기가 되어서였다. 월미도 미군 기지에 체류하고 있었던 중립국휴전감시위원단원인 체코 대표 4명 중에 1명이 위장한 소련군 장교라는 소문과 이들이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것을 규탄하기 위해 인천시민 학생들이 궐기한 것이다.

 

미군이 월미도 북쪽 끝 해안에 남아 있던 부서진 해수풀장 근처에 약간의 모래사장을 개방해 준 것이 60년대 초반쯤일 것이다. 주말이면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가 미역을 감던 추억이 새롭다. 그 후 매립이 진행돼 모래사장은 사라지고 월미도는 주변의 공장지대와 횟집과 시끄러운 놀이시설이 들어 찬 괴상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 안타까움을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 생전에 이렇게 적으셨다.

 

유명했던 월미도 둑길도 요즘에 와서 양륙 물량을 늘리고 임해공장지대를 확장하기 위해 양 옆으로 한없이 매립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 자리를 알아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월미도는 섬이 아니라 어엿한 반도처럼 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온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일도 있던 월미도가 이제는 애석하게도 내항의 갑문, 임해공장지대, 그리고 즐비한 횟집으로 그 이름을 이어가게 된 몹시 산문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월미도는 이제 산문(散文)이 아니라 잡문(雜文)으로 전락하는 모습이다. 꼭 이 아담한 월미산 위에 세웠어야 했나 싶은 전망탑과 어설프게 모방한 전통 정원과 살풍경하게 조망(眺望)을 가르고 섬을 일주하는 모노레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제대로 된 인천을 찾고 싶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