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전쟁 속에 꽃 핀 인천 문화예술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0-04-03 22:50:01
6ㆍ25 전쟁 속에 꽃 핀 인천 문화예술
오늘날의 예총(藝總ㆍ전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전신은 1949년에 출범한 인천예술인협회였다. 이들은 민족진영계의 문화예술인들로 그 해 2월 서울에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文總)가 결성된 데 대해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 출범했다. 이듬해인 1950년 6월 12일, 그 회원 대부분은 문총(文總) 인천지부를 창립하는 데 동참했다.
글 조우성 시인,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시인 조지훈, 인천문총구국대 결성 종용
인천예술인협회원들은 광복을 맞은 지 5년여 동안 비로소 우리말로 시를 쓰고,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이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내 나라, 내 겨레의 정서를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했다.
그리하여 일제에 의해 심히 왜곡, 굴절되었던 민족정기를 문화예술로써 바로잡자는 일념뿐이었다. 창립 열흘 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동족상잔의 6ㆍ25전쟁이 발발할 지는 꿈에도 그들 중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문화예술을 일으켜 세워 오순도순 살기 좋은 내 나라, 내 국토를 건설해 보자는 웅지는 펴 보지도 못한 채, 절체절명의 위난 속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기에 전전긍긍하였고,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군과 연합군이 9ㆍ15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하자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속속 모여 들었고 이어 ‘인천문총구국대’란 이름으로 결집해 전쟁 중 문화예술 활동을 맹렬히 펼쳐나갔다. 당시 인천문총구국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장 표양문, 부대장 우문국(미술), 신태범(문학), 총무 조병화(문학), 선전국장 이인석(문학), 차장 유희강(서예), 집행위원 이경성(미술), 이민(연극), 최성진(음악), 김학수, 김영건, 김찬희(미술), 조수일, 김차영, 한상억, 임진수, 최성연, 김양수(문학), 박세림, 장인식(서예), 최영섭. 이인영, 오재섭(음악), 김인수, 경세호(사진), 김철세, 조종국(영화), 이승하(연극), 김응태, 이정훈, 김은하(언론), 윤기영, 박윤섭 등이었다.
후에 문총 부위원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인천문총약사(仁川文總略史)’에서 인천문총의 창립 과정과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인천문총 결성의 기운은 민족진영의 문화인들이 집결하여<중략> 당시 우왕좌왕하는 이 땅의 문화인들에게 하나의 진로를 제시하며 민족 문화를 향상시켜 보려는 투쟁의식에서 양성(釀成)되었던 것이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더불어 시인 조지훈이 이경성에게 인천문총구국대 결성을 종용하였고, 그에 의해 1차 준비 회합을 서예가 박세림 가에서, 2차 회합을 시인 조병화 가에서 가진 후 구국대 강령, 규약, 간부 구성이 완료하였다고 전한다. 문총구국대 인천지대는 문총회관을 인천신보(경기매일신문의 전신) 2층으로 정하고 ‘우리 문화인도 전열(戰列)에’ 라는 슬로간 아래 즉시 행동에 돌입했다.
이경성은 그 창립 당시의 상황을 “인천문총의 진실한 역사는 이 공포와 전율과 전란 속에 낙엽 같은 문화인들이 모여 들어 고독과 불안을 면하고 오직 생을 유지하려는 이 시간 속에 태동되었다고 단언하여도 과언이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총구국대 인천지대가 벌인 첫 활동은 1950년 10월 30일 동방극장(東邦劇場)에서 연 ‘멸공 문화인 궐기대회’였다. 오늘날 ‘멸공(滅共)’이란 단어는 분단극복의 걸림돌로 여기지만 당시로서는 가식 없는 국민적 의식의 표현이었고, 문화예술인들은 그를 반영한 작품을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날 대회에서는 소설가 김동리의 강연과 시인 조지훈, 장만영, 조병화, 이인석 등의 시 낭송이 있었다. 시인
조병화는 ‘단 하나의 태양 아래 모여 살자’라는 시를 낭독했는데, 전시 문학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아, 기억하기에도 몸서리치는/살기찬 공포와 불안과 그러한 전율에 휩쓸려/우리 모다 믿지 못할 생명들을 지니고/일그러진 절망 기슭을 방황하며/단 하나 기적 있기를 바라다 쓰러진/수없는 사람들 속에/또 하나 불안한 기적을 애원하던 겨레들이//그날/진정 기적이 돌아오던 그날/1950년 9월 15일/허무러진 굴 밖으로/거리로/바리케이트를 차버리고/아름다운 우리 목소리들을 다시 높혀서/눈물겨워 오고가던 것은/진정 폭풍우가 사라지는 끝에/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우리 깃발 아래서가 아니드냐/태극기와 더불어/자비한 유엔 깃발 그 깃폭 아래서가 아니드냐<후략>”
1952년 10월 인천문총회보 창간
그 후 문총구국대 인천지대 대원들은 반공의식 고취 강연회와 문예 작품 신문 게재, 종군 활동, 반공 표어 가두 전시, 시화전 등을 개최했다. 이들은 1952년 10월 20일 ‘인천문총회보’ 창간호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갱지 A4 8면 분량의 회보에는 창간사, 총회 보고, 최성진의 음악 인천의 회고와 전망, 최성연의 ‘모색하는 한국 영화’, ‘문화유산의 수호’, 산하 단체의 임원 명단 등이 실려 당시의 정황을 엿보게 한다. 특히 김양수의 시 ‘아! 백마산 고지’는 당시 처절했던 전쟁상을 형상화해 눈길을 모은다.
“일찍이 없던/하늘이 여기 새로히 뒤덮히고//하늘을 삼킬 듯/드설레는 피바다가 용솟음을 친다//연막(煙幕) 속에 톱날처럼 갈리는/외마딧 소리들은/폭풍인 양 적진(敵陣)을 휩쓸어//눈이 빠지게 원수를 노려/내닫는 용사의 가슴은/감내치 못해 부풀어 오른 미움이/울화되어 터진다//산이 무너지느냐 바다가 메워지느냐/튀는 돌뿌리 억수로 쏟아지는/불비 속에/산을 쌓는 건 시체의 무데기//길은 오직 하나뿐이다//아아, 태극기가 숨막히게 휘날리는/백마산 고지/포문이 휘어지게 달은 등성이에선/붉은 피가 쇳물처럼 녹아흐른다”
한편 음악인들은 해군 인천경비부 정훈실, 인천신보사, 대한신문사(전시판) 후원으로 ‘전시 합창의 밤’이란 부제가 붙은 ‘9ㆍ15수복 기념 대음악발표연주회’를 1951년 9월 22일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畵劇場)에서 연다. 이날 레퍼토리는 최영섭 지휘의 합창 ‘우리는 국제연합
이다(UN 제정)’를 필두로, 김병일의 피아노 독주 ‘항가리 광시곡 6번’, 테너 백석두의 ‘라파로마’, 장보원의 피아노 독주 ‘군대 포로네스’, 합창단의 ‘병사의 합창’, 박상만의 바이올린 독주 ‘추억’, 합창단의 ‘해군인천경비부가’, ‘개선 대합창’ 등을 연주해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진예술인들은 1951년 11월 24일 문총회관에서 ‘제1회 문총 예술제전’의 일환으로 ‘전시사진전(戰時寫眞展)’을 연다. 최성연의 ‘냉전(冷戰)’, ‘잔해(殘骸)’, 김철세의 ‘싸우는 농촌’, ‘풍년의 개가(凱歌)’, 김득주의 ‘탱크’, 김명철의 ‘념녀마세요’, ‘받드는 사람들’, 김인수의 ‘관중없는 벤취’, 김영복의 ‘농역군(農役軍)’ 등도 전시의 참담한 현실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었다.
전쟁중 애환 같이한 문화예술
미술계의 활동은 휴전협정 조인 직전인 1953년 7월 4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연 ‘제3회 미술전’을 자료밖에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양화부(洋畵部)에는 김학수의 풍경 시리즈, 김영건의 귀향가족, 월미도 풍경, 바다, 초가, 한흥길의 창영동 고개, 전재(戰災) 부락, 유희강의 뜰, 꽃, 자매 등이 출품됐고, 서예부에는 취정 허리복의 경천애인(행서), 종군행(從軍行)(초서), 백두산석(石)(예서), 검여 유희강의 5월의 향기(한글 행서), 관동별곡(행서), 동정 박세림의 반야심경(해서), 녹음시(행서), 우초 장인식의 고시조(한글 행서), 오우가(한글 초서) 등이 선을 보였다.
이렇듯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은 전시 중에도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문학, 음악, 미술, 사진예술로서 표출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집을 잃고 망연자실해 하던 시민들과 문화와 예술로써 애환을 같이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6ㆍ25전쟁 60년을 맞은 오늘, 자료의 망실 등으로 아직 인천의 전시예술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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