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의 국내 등장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0-24 21:38:14
개항이후 상륙'서양 탕약'대불호텔서 첫 판매 추정
프롤로그 2 - 다방의 국내 등장
▲ 1936년 당시 신문에 실린'끽다점'풍경.
우리나라에 커피나 홍차가 전래된 때는 대략 언제쯤이고, 그것을 주 음료로 한 다방이 생긴 시기는 언제일까. 커피와 홍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개항이 이루어지고 개화 문물이 수입되면서이고 다방 등장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특히 개화 문물은 대부분 인천 개항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끽음료(喫飮料)도 최초로 인천 땅에 상륙했을 것이고, 개항과 거의 동시에 인천에 상륙한 독일, 미국, 영국 등의 무역상인들, 선원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인천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1885년 4월 5일자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의 일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大佛)호텔'이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거나 마신 '공공 현장'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공공 현장'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분명한 기록이 없어 대불호텔에 근대적 형태를 갖춘 호텔식 다방이 있었다고 확정할 수 없기때문이다.
아무튼 커피 마시는 풍속은 외교 사절들에 의해 고종을 비롯한 당시 고관들과 개화파 인사들에게 전해져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은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는데 특히 향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기가 전해진다.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金鴻陸)이 커피에 독을 넣어 고종을 시해하려던 '독다사건 (毒茶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울에서 최초의 커피 판매가 이루어진 곳은 1902년 서울 정동(貞洞)에 들어선 회색 벽돌의 손탁호텔 1층식당 옆 다실이다. 손탁호텔은 독일계 러시아 여성 손탁(Sontag)이 세운 것이다. 그녀는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Karl Veber)를 따라 서울에 와서 궁궐의 양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했다. 1895년 고종으로부터 정동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후에 그 자리에 서울 최초의 호텔을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출현한 최초의 다방으로는 흔히 1923년 일본인이 명동에 연 '후타미(二見)다방'을 꼽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1913년 남대문역에서 문을 연 '남대문역다방'이라고 한다. 1915년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 철도여행 안내> 책자에 '남대문역 기사텐(喫茶店) 내부'라는 글과 함께 이곳의 사진이 실려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다. 실제 1922년에 발간된 <경성명감(京城名鑑)>에도 마쓰이(松井嘉一郞)라는 일본인이 1913년 4월 이래, 조선총독부 철도국 '남대문역 끽다점'에 물품을 납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다방이 등장한 것은 3·1운동 직후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이전에는 앞서 말한 손탁호텔 다방에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목당(靑木堂)'이라는 2층 살롱과 1914년 총독부 철도호텔, 조선호텔 다방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1923년을 기점으로 바로 '후타미(二見)다방'과 역시 일본인 소유의 '금강산다방'이 충무로에 문을 여는 것이다.
원음과 비스하게 소리 낸 가배차(珂?茶), 가비차(加比茶), 혹은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며 기운도 내게 하는, 쓴맛이 나는 서양 탕약이라고 해서 양탕(洋湯)이라고 부르던 커피와 함께 유성기 음악을 들을 수 있는이 다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은 일본인들이 처음 문을 연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저들 일본인들과 일부 조선 상류 계층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서구 모던의 상징으로 여기던 '카페의 풍조'를 접할 수 있었던 부류는 이들뿐이었고, 그래서 처음 문을 열 당시 그들은 다방을 자신들만의 '구락부(俱樂部)' 형태로 운영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 후반에 들면서는 서양 문물의 보급이 더욱 가속화되고 일본 유학이나 미주 현지를 돌아본 지식인들이 늘어나면서 다방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게 된다. 그러면서 다방의 상업적 경영 개념이 도입되고, 이들 인텔리 계층과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장소로 변모하게 되면서 다방은 이런 부류들이 차를 마시고 한담과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이 무렵 다방들이 곧 연극인, 영화인, 소설가, 시인, 기자, 건축가 등 이른바 문화 예술인들의 손에 의해 직접 탄생했던 까닭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당시 서울 풍경을 요약하면 '다점(茶店) 혹은 끽다점(喫茶店)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유행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다.
혼마치(本町) 일대를 중심으로 192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이 세운 다방은 남촌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그 유행은 조선인 다방으로 이어졌다.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寬勳洞) 입구에 카카듀, 1년 뒤 작년에는 배우 복혜숙이 종로 2정목에 비너스를 개업했다.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다방은 지난달 종로2정목에 개업한 멕시코다. 그 다방이 개업한 11월 3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여파가 지금 경성에 날로 확산 중이다. 이제 커피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호텔 커피숍과 다방에서만 마시는 것도 아니다. 지금 조선은행(朝鮮銀行) 광장 분수대 앞 본정 1정목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완공되는 내년이면 백화점 안에 커피숍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옥상에 노천카페가 들어선다는 소문도 있다. '커피 끓이는 법'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2년 전에 있었다.
잡지 <신동아> 창간 80주년 논픽션 형식의 연재물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시리즈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의 일절이다. 1920년대 서울의 다방 탄생과 함께 점차 커피가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우리 문화 예술인들에 의해 탄생한 다방과 유행 실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1901년 6월19~21일 황성신문에 실린'한성 니현(지금의 충무로) 구옥상전'의 광고. 외국에서 들어온 가배탕, 포도주 등을 판매한다는 문구가 보인다. 가배탕은 각설탕 속에 커피가루를 넣은 것으로 더운 물에 가배탕을 몇 개 넣으면 풀어지고 속에 들어있던 커피가루가 퍼진다.
1927년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 입구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개업하였는데, 이경손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춘희> <장한몽>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그가 직접 차를 끓여 더욱 유명하였다. 1929년 종로2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 근처에 '멕시코다방'이 개업했는데, 주인은 배우 김용규(金龍圭)와 심영(沈影)이었다. 의자와 테이블 등 실내장식을 화가·사진작가·무대장치가 등이 합작함으로써 문화인들의 종합작품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소공동에 '낙랑파라'가 등장하면서 초기 동호인의 문화애호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영리 면에도 신경을 쓰는 본격적 다방의 면모를 갖추었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도 다방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는데, 실내 시공만 하였다가 팔아넘긴 '식스나인(6·9)', 1933년 종로에서 부인과 함께 개업한 '제비', 인사동의 '쓰루(鶴)', 1935년 직접 설계하여 개업 직전에 양도한 '무기(麥)'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33년 '제비' 개업을 전후하여 영화연극인·화가·음악가·문인 등에 의하여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은 각자 특색을 자랑하며 종로·충무로·명동·소공동 등에 다방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명동의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음악 감상 전문의 '에리사', 프랑스풍의 '미모사', 독일풍의 '윈', 매주 정규음악회를 열어 유명하였던 '휘가로', 서울역 앞 이별의 장소로 애용되던 '돌체' 등이 다방문화의 선도자였다.
재미있는 것이 '요절한 천재' 이상(李箱)의 이야기인데 문학적 천재 이상으로 다방 경영에도 남 앞서가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식스나인(6·9)이라고 퇴폐의 냄새가 나게 이름 붙인 그다운 발상과 시공을 한 뒤 재빨리 남에게 넘긴 기민함이 놀랍다.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 출신으로 이때만 해도 경제적인 안목이 뚜렷했었는지, 연속해서 세 개의 다방을 설계하고 개업한 수완에 놀랄 따름이다.
이밖에도 미술가 이순석(李順石)이 소공동 초입에 문을 연,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던 ' 낙랑(樂浪)팔라'가 있었다. 아무튼 1934년 12월 <개벽>지에 실린 기사에도 소설가 최정희(崔貞熙)가 근간 끽다점 '쁘나미'를 경영하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것이 될 듯하다가 틀려버렸다고. 불운한 해는 만사가 불여의(不如意)인 모양"이라는 동정 기사를 싣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도 "1933년 '제비' 개업을 전후하여 영화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 등에 의하여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할 것이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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