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아펜젤러가 마신 대불호텔의 커피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1-21 10:59:50
서양요리와'찰떡궁합'커피 마실 곳 있었을 듯
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5 아펜젤러가 마신 대불호텔의 커피
▲ 근대 커피잔. 명치 43년(1910)에 커피잔을 구입하고, 대정 6년(1917)에 커피잔을 보관하는 나무상자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사진제공= 인천시립박물관
국내 여러 문서가 다방이나 커피를 언급할 때 인천의 대불(大佛)호텔을 거명한다.
대불호텔은 서울 정동의 손탁 호텔보다도 훨씬 먼저 개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서 거기에 들었던 숙박객은 당연히 '과거 한국인이 숭늉을 마시듯' 커피를 마셨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다.
규모가 작았다고 해도 호텔인 이상 식당과 커피를 마시는 다방 혹은 휴게실 같은 구조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곁들여서.
대불호텔의 개업 연도를 흔히 1888년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 해는 사업 번창에 따른 '개증축 혹은 신축'이 완료되어 다시 개업한 연도이다.
대불(다이부츠)호텔이 이미 그 이전에 존재했음은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상륙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일기에서 확인된다. 그는 다이부츠를 '사이부쭈'로 발음하고 있다.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사이부쭈(大佛?)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선상 예배에서 버나도(Bernardo) 씨를 만났는데, 그는 한국에 대해서 좋게 말했다. 잠은 잘 잤다. 비록 미국 호텔만큼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기선보다는 나았다.
덧붙여 그가 본국으로 보낸 4월 9일자 연례보고서에도 "호텔 방은 편안하고 넓었으나 약간 싸늘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입에 맞는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는, 서양 요리와 함께 충분히 커피나 홍차를 연상할 만한 구절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그가 '커피나 홍차'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것이 요리가 아니라 과거 우리 밥상의 숭늉처럼 식탁의 부속 음료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음식이 입에 맞았다'고 말할 때 '숭늉까지 입에 맞았다'고 하지 않던 경우와 같을 것이다.
▲ 1890년대 제물포항. 해안가에 솟은 벽돌식 건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다.
특히 개화 문물은 대부분 인천 개항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끽음료(喫飮料)도 최초로 인천 땅에 상륙했을 것이고, 개항과 거의 동시에 인천에 상륙한 독일, 미국, 영국 등의 무역상인들, 선원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인천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1885년 4월 5일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일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大佛)호텔'이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거나 마신 '공공 현장'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공공 현장'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분명한 기록이 없어 대불호텔에 근대적 형태를 갖춘 호텔식 다방이 있었다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장의 '제2화 다방의 국내 첫 출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인용한 것인데 굳이 대불호텔 안에 커피를 파는 별도의 다방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확답은 곤란하다는 취지에서 쓴 것이다.
▲ 1890년대 중반의 일본인 거리와 대불호텔 전경.
실제 그의 글 어디에도 이 호텔의 다방이나 휴게실 같은 것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위의 기록들에서 추정이 가능한 것은 '스스로 끓여 마신 것이 아닌' '호텔 숙박 및 식음료 대금에 포함되는' 차를 대불호텔에서 판매했으리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대불호텔이 차를 판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현장'이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대불호텔에 대해 기록을 남긴 외국인 중에 음식이나 이 호텔 식당에 관한 내용을 적은 사람은 아주 드문데, 불란서 외교관 이뽀리트 프랑댕(Hippolyte Frandin)이 자신의 저서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에 꼭 한 마디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집필이 시작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명성황후 알현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95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번역본에는 다이부츠 호텔을 '다이부토 호텔'로 표기하고 있다.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후덕했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 싸구려 호텔 주인은 유럽식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의 자부심이 때때로는 근거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한국에 사는 유럽 상인이나 공무원들은 어쩌다 집을 비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온갖 자유를 누리게 되는 법이다. 이때 유럽인 집에 고용된 요리사들-중국인이나 일본인들로 한결같이 유럽 요리 전문가들인-은 다이부토 호텔에 임시로 고용되어 그 식당이 유럽 요리 명소(名所)라는 명성을 얻는 데 일조(一助)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댕은 "운 없게도 그 반대 시점에 호텔에 도착했던" 까닭에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식당'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이 호텔에 분명 저들이 음료인 '커피나 홍차를 마실 만한 장소'가 있었으리라는 점을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음식이 잘 요리되어 입에 맞았다는 아펜젤러와, 차마 기록할 수 없을 지경으로 형편없었다는 프랑댕. 아펜젤러보다 대불호텔에 도착한 연대도 훨씬 뒤일 터인데 어째서 이처럼 극단적으로 상반된 표현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이것이 미국인 선교사와 불란서인 외교관의 성품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두 사람 외국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이 호텔 안에 식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그를 통해 실제에 근접한 유추(類推)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한국 최초로 차를 판매한 장소, 다시 말해 아주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호텔식 다방'이 여기 대불호텔 안에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실 같은 공간이 있었음을 추측케 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대불호텔 이래 고식(古式) 피아노 한 대가 전하여 오고 있다"고 한 고 최성연(崔聖淵) 선생의 저서 <개항과 양관 역정>의 기록이다.
후일 대불호텔은 주인 호리 리키타로오(掘力太郞)의 아들이 중국인에게 매각해 중화루(中華樓)라는 청요리집으로 바뀌고 그 중화루가 근래에까지 영업을 지속해 왔는데, 거기에 피아노가 한 대 전해져 왔다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이 고급스럽고 값비싼 청요리집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를 못한 까닭에 그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얼핏 이 피아노에 대한 말만은 들은 기억이 있다.
1960년대 그 근처에 거주하던, 피아노를 잘 치는 친숙했던 I여고 학생이 그것에 대해, '인천 최초의 외국제 피아노'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이다. 이 피아노에 대해서는 생전의 신태범(愼兌範) 박사로부터도 들은 바 있다.
아무튼 여기서 이 대불호텔 피아노의 용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 축음기가 없던 시절(축음기는 미국의 에디슨이 1877년에 발명해 대불호텔에는 아직 도입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어서 아무래도 식후의 여흥이나 여유 시간, 휴식을 위해 가볍게 연주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커피나 홍차와 음악! 이 피아노만 가지고도 분명 호텔 안에는 다방과 유사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최소한의 '휴게실' 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물론 식당이 이 같은 기능을 겸했었다고 해도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끽다실'을 보유한 최초의 호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대불호텔은 제물포 포구에 자리잡고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던 호텔이었다. 최성연 선생의 기록대로 당시 외국인들은 "한국을 찾게 되면 서울을 들러야 했고 서울을 가려면 싫어도 인천에 상륙하게 마련이었다. 철도가 생겨나지 못한 그때는 부산이나 원산서 서울까지 보행으로 걷지 못할 바에야 애당초 기선으로 인천에 닿는 것이 상책이었던 까닭"에 호텔은 번성을 누렸다.
그러나 서울행을 위해 하루 이틀 인천에 묵어가던 외국인들은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당일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그 때문에 호텔업은 수지가 맞지를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견디다 못한 리키의 아들이 1918년 무렵, 마침내 호텔을 청국인에게 매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차를 팔던 '다실'의 종언(終焉)을 의미하는데, 이후 인천에는 더 이상 '다방, 다실' 같은 공공이 이용할 만한 '끽다 장소'에 관한 기록을 보이지 않은 채 1930년대까지 오게 된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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