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외국인 묘지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2006-12-26 02:00:07
최초의 외국인 묘지
지난 1883년 '강제 개항' 후 외국인들이 그 어느 곳 보다 많았던 인천에 외국인 묘지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권을 노린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열강들이 물밀 듯 인천 땅에 상륙함에 따라 외국인 특정거류지역인 지계가 설정됐다.
외국인들은 그 곳에서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며 '이국살이'를 하게 됐다.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자연히 노환이나 각종 사고로 사망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유해를 본국으로 보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거주지 인근 야산을 골라 공동 묘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일인묘지, 청인묘지(의장지). 각국 지계 외국인묘지가 자리잡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장지인 청인묘지는 지난 1884년 3월7일 우리 정부와 청나라가 맺은 '인천구화상지계장성조약' 이후 마련됐다고 한다. 이 조약은 청국인의 인천거주에 관한 규정으로 '제물포와 10여리 떨어진 지대 이내에 청국상인들이 마음대로 좋은 산을 골라 공동묘지를 만들되 그 지역에 반드시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넓어야 하고, 묘지를 지킬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 청인들은 지금의 남구 도화동 시립인천대 자리 야산에 묘지를 만들었다. 외국인 공동묘지로 중구 북성동과 율목동 일원의 일본인 묘지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묻혀 있는 북성동 묘지를 '외국인 묘지'라고 불렀다. 이 묘지의 최초 매장은 1883년 7월로 기록돼 있다. 외국과의 수교와 지계 협약 날짜보다 앞서는 셈이다.
이미 수교 이전에 인천에서 활동하던 외국인들이 숨지면, 일단 바다 인근 언덕에 묻었다가 나중에 공동묘지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1914년 지계제도가 철폐된 후 각국의 영사관이 관리를 하던 외국인 묘지는 1941년 3천여평만 남긴 채 5천여평을 철도부지로 수용당하게 된다. 그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지금의 연수구 청학동으로 옮기게 됐다. 이 묘지에는 개항 이후 이국 땅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이 잠들어 있다.
청학동의 외국인 묘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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