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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의병장 이윤생

by 형과니 2023. 3. 22.

의병장 이윤생

仁川愛/인천의 인물

 

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이윤생

 

생 애

 

 

1604년 인천 용현동에서 탄생

조정에서 충무위부사과라는 벼슬을 내림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움

1637125일 의병들과 함께 전사함

 

280여년전의 이윤생은 비룡현(지금의 용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 이희목의 19대 종손으로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 그가 쏜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고 사나운 말도 양처럼 다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윤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무예를 열심히 닦았다.

 

이윤생이 33세 되던 해(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단숨에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 왔다. 이에 조정은 왕비를 비롯하여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태자빈 등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까스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산성은 완전히 적에게 포위되고 백성들은 적의 말발굽에 짓밟혀 신음했다. 이에 이윤생은 끓어 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아, 이제 나라를 위해 죽을 때가 왔노라.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나라를 위해 죽을 자 나를 따르라"고 외쳐 의병을 소집했다. 평소에 그의 덕을 흠모하던 젊은이들이 삽시간에 구름처럼 모였고 이들은 이윤생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의병군은 남한산성과 강화를 지키기에 알맞으며, 적의 유격군이 내왕하는 길목인 낙섬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웠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윤생의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이듬해 124일 많은 청군이 낙섬에 쳐들어 왔다. 벌떼처럼 밀려드는 적군을 맞아 이윤생이 거느린 의병들은 용맹스럽게 맞서 싸뭐 막았다. 의병들이 빗발처럼 쏘아대는 화살에 적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달아났지만 또 다시 다시 쳐들어 왔다. 이러한 싸움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되자 의병들이 가진 화살도 바닥나고 말았다. 이것을 알아차린 적군은 총 공격을 해 왔다.

 

이윤생 의병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우리 모두 최후까지 싸우자!"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앞장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윤생 의병장은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4살었다.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좌승지 벼슬을 내리고, 정려를 세웠다. 한편, 그의 부인 강씨도 남편이 전사한 소식을 듣자 곧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라 열부 강씨의 정려도 함께 내렸다.

 

이윤생·강씨정려 (李允生·姜氏旌閣)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수량/면적 1/66

지정(등록) 1990.11.09

소 재 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독배로404번길 34 (용현동)

소유자(소유단체) 부평이씨승지공파종친회

관리자(관리단체) 부평이씨승지공파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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