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구의 역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08:56:06
인천-연수구의 역사
인천의 옛지명은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백제건국의 전설에 따르면 백제시조 온조(溫祚)의 동복형(同腹兄)인 비류(沸流)가 오늘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彌趨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 발상이라 하며 삼국시대에는 고려, 백제, 신라 3국간쟁탈의 목표가 되었던 곳이었다.
3국간의 영토로 번복 변천을 거듭하다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신라의 신주(新州)인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고 경덕왕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불러 율진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9년(1018년)에는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의 고향이어서 경원군(慶源郡)으로 올리었고 인종 때에는 또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고향이 되어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고쳐졌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고, 조선왕조의 태조 원년(1392년)에 다시 인주(仁州)로 되고 태종 13년(1413년)에 이르러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세조6년(1461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이므로 해서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연수구 지역은 1413년 인천도호부 먼우금면의 옹암리(甕岩里), 먹암리(墨菴里), 망해리(望海里), 동막리(東幕里), 척전리(尺前里), 한진리(漢津里), 함박리(咸朴里), 야동(冶洞), 옥동(玉洞)지역으로, 1914년 부천군(富川郡),문학면(文鶴面)에 편입되었으며, 인천부역 확장시 인천부로 재편입되었고 1968년 남구에 편입되었다가 1994년 12월 16일 법률 제4802호에 의거 옥련(玉蓮), 선학(仙鶴, 연수1(延壽1), 연수2(延壽2), 청학(靑鶴), 동춘(東春)동을 分割하여 1995년 3월 1일 南區에서 5개 法定洞과 8개 行政洞으로 분구·개청하여 1996년 1월 1일 동춘2동에서 청량동 분동에 따라 5개 법정동과 9개 행정동을 관할하는 『仁川廣域市 延壽區』로 정식출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