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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벽안 김응태,향토계 언론 거목

by 형과니 2023. 4. 1.

벽안 김응태,향토계 언론 거목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53:23

 

벽안 김응태,향토계 언론 거목

 

기획특집 <인천인물 100>

 

 

1973년 서슬퍼런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 말살정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향토 언론계의 거목 '벽안(碧眼) 김응태(金應泰:1921~1995)' 선생.

 

강제 통폐합을 당할 당시 선생의 참담한 심정에 대해 언론계 후배(오광철·70·인천일보 주필)는 이렇게 술회했다.

 

“1973831일 경기일보 마지막 신문을 찍어낸 뒤 신문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모(字母):활자를 주조할 때 자면(字面)을 만드는 형(). 모형(母型)이라고도 한다)' 를 고철로 팔기 위해 삽으로 가마니에 퍼담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조금 뒤면 고철 덩어리가 될 자모를 '살살 다뤄라. 자모 상할라' 라고 흐느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8·15 해방직후인 1948년 창간된 인천지역 최초의 지방지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지 25, 역정의 세월을 선생은 그렇게 정리했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이방인을 닮았다고 해서 '벽안(碧眼:푸른 눈)'이란 아호를 가진 김응태 선생은 1921723일 인천시 동구 화평동 409에서 태어났다.

 

내리교회 부설 미션 사학인 '영화학교(초등교육기관·74년 폐교)'를 졸업(1933)한 뒤 곧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넉넉지는 않은 편이었다.

 

후배 언론인 김양수(73·평론가) 선생은 영화학교 졸업 당시 김응태 선생이 2, 한양대 교수를 지내신 이순복씨가 1등이었다. 이순복씨와 김응태 선생 모두 집안 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하루는 두분이 함께 자유공원에 올라가 가난을 한탄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김응태 선생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선생은 영화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인천공립상업보습학교(현재의 중학교 과정)'에 진학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부터 19446월까지는 인천우체국에서 우편서기보로 일을 했다.

 

8·15 해방 직전인 19455월 판임(判任:현재의 공무원 직급상 7~9) 직위로 인천부(현 인천시청)에 들어간 선생은 '대중일보'로 자리를 옮기기 전인 19472월까지 공직생활을 계속한다.

 

선생이 공직을 그만두고 언론계에 뛰어든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인천일보 오광철 주필은 인천시청에서 시정계장으로 근무하던 선생이 초대 인천시장인 임홍재(任鴻宰)씨가 대중일보로 자리를 옮길 때 함께 갔다는 얘기를 선배들을 통해 알고 있다고 전할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인지 '대중일보' 당시 선생은 인천시청을 출입했다고 한다.

 

'대중일보' 기자로 명성을 떨치던 선생은 6·25 전쟁이 발발하고 9·15 인천 수복을 계기로 '대중일보''인천신보'로 제호를 바꿔 속간되면서 사회부장을 맡는다.

 

당시 '대한신문'기자였던 김양수 선생도 1953'인천신보' 문화부장으로 입사하면서 편집국장이었던 김응태 선생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1954'주간인천'이 창간되면서 김응태 선생은 편집국장과 사장(1960)을 역임하고 1960'주간인천''인천신문'으로 바뀌면서 다시 편집국장과 부사장(1965)을 맡게된다.

 

1966년 경기일보가 창간되자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편집국장(72)을 거쳐 부사장(73)까지 오르지만 여기서 붓을 꺾고 만다.

 

당시 유신정권의 지역언론 말살정책인 '11사주의(一道一社主義)'에 따라 1973731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는 '경기매일신문+경기일보+연합신문'을 통폐합한 '경기신문(현 경인일보)'91일부터 발행한다는 조인식이 치러졌다.

 

선생의 34녀중 막내인 영욱(42·인하공전 학생복지팀)씨는 아버님이 '경기신문' 사장을 제의받았지만 고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님께서 제의를 받으신 뒤 그렇다면 식자공 몇 명과 함께 입사하겠다고 하자 '경기신문'에서 이런 제의를 거부해 언론계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도 있다.

 

통폐합 당시 한 신문사 고위간부였던 향토 언론인은 익명을 요구하면서 당시 여러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김응태 선생이 사장직을 제의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경기신문' 창간을 주도한 인사들과 선생은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응태 선생은 이후 인척관계인 한진그룹 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인하대 사무처장(75)과 인하학원 사무국장(78), 인하학원 이사(80)로 근무한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언론중재위원으로 다시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지만 1995729일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현역 복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인천 로타리클럽 창립(1957)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67년부터 맡은 클럽 주보(週報) 편집위원장 자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애착을 갖고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선생은 현역 언론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60년대에 '인천 신문 박물관' 건립을 꿈꾸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천일보 오광철 주필은 1966년 선생이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긴 뒤 인사차 들렀을 때 문서고를 구경시켜주면서 건네준 활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초호(금속 활자 크기의 한 종류) 크기의 '마루 종()' 자 였는데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1971년 제가 경기일보로 옮긴 뒤 선생에게 활자를 내놓자 하시는 말씀이 '신문박물관 만들면 내놓지' 였습니다. 미뤄 짐작해 볼때 선생은 당시 신문박물관 건립에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인천 신문 박물관'에 대한 자료나 기억은 더이상 구하지 못해 어느 정도 구체화됐는지는 알 수 없다.

 

유려한 말솜씨를 자랑한 선생이었지만 평소 집필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19716월말부터 이듬해 4월말까지 '경기일보' 1면 하단에 고정으로 실렸던 '바람개비란'에 초창기 몇 편을 직접 작성한게 육필 원고로 알려져 있다.

 

'智能化副讀本 消化'라는 제목의 글(경기일보 1971628일자 2면 바람개비)에서 선생은 학생들에게 책을 강매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이후 몇 편을 더 집필했다고 하지만 필자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선생이 세상을 뜬 지 어언 10년이 흘러가고 있다.

 

향토 언론계의 스승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지금 선생을 떠올릴만한 흔적을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시립도서관(중구 율목동)의 낡은 문서창고에 남아있는 신문 몇 점이 고작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선생이 건립을 구상했다는 '인천 신문 박물관'이 강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은 비단 기자만이 아닐 듯 싶다.

 

[인터뷰] 오광철 인천일보 주필

 

언론인 오광철(70·현 인천일보 주필)씨는 김응태 선생을 '정열과 집념이 넘치면서 정열적으로 신문을 만들었던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

 

김응태 선생이 인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1961년 수습기자였던 오 주필은 한 일화를 들면서 꼼꼼했던 선생의 면면을 소개했다.

 

후배들이 한글맞춤법을 잘 몰라 옆사람에게 물어볼라치면 선생님은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지요. 물어서 맞춤법을 알고나면 금방 잊어버리지만 사전을 찾아 확인하면 기억이 오래가기 때문에 그렇게 하곤 했지요. 그래서 후배기자들이 사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을 지켜보면 '목수가 대패 안갖고 다니느냐'며 호통을 치시곤 하셨습니다.”

 

한번 화가 나면 후배들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들 정도였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주재기자가 자신이 취재한 기사를 엉뚱하게 편집해 신문에 실었다고 항의전화를 했죠. 그러자 당시 국장석에 앉아계시던 선생님이 해당 편집기자를 불러 교정원고(당시는 원고를 며칠씩 보관)를 가져오라고 한 뒤 사실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편집기자의 잘못이 확인되자 그자리에서 원고를 찢은 뒤 얼굴에 뿌려버리시더군요.”

 

그러나 이런 모습 보다는 '정이 뚝뚝 흘러넘칠 정도로 자상한 선배'였다는게 오 주필의 기억이다.

 

김 선생은 '뻐끔 담배'로 하루 몇갑을 태울 정도의 '골초', 배갈이든 소주든 종류에 관계없이 언제나 사기로 만든 물컵에 가득 따라 한숨에 들이켜던 애주가였단다.

 

당시만 해도 언론계에서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머리나 주머니에 술을 부어 마시게 했지만 김 선생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 주필은 “739월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현직을 떠난 뒤에도 항상 옆구리에 신문 뭉치를 끼고 다닐 정도로 애착을 보이던 선생의 열정이 아직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 김도현·kdh6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