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계 거봉 동정 박세림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1:14:51
박세림선생의 따님과 친손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인천의 서예가와 예총책임자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합니다.
한국 서예계 거봉 동정 박세림
불혹(不惑)의 나이에 한국 서단 최고의 자리에 오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그는 1967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과 대한민국 '10대 서예가'로 선정됐다.(당시 신동아 4월호) 43세 되던 해의 일이다.
동정은 인천사람이다. 강화가 그의 출생지다.
그는 짧다면 짧은 반세기 동안 인천에서 수십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인 서예계의 거봉(巨峯)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런 동정의 예술혼을 고향 땅 인천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지난달 17일 대전시 동구 용운동 대전대학교 박물관. 대전대 도서관 한켠에 자리잡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동정의 서예세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평생동안 남긴 주옥같은 작품 수백여점은 박물관 벽면에, 가족사를 담은 사진과 동정을 서예계로 이끈 각종 중국의 고서 등은 전시실에 보관돼 있었다.
한국서단을 대표하고 인천 서예의 위상을 높였다는 그의 예술혼이 대전으로 옮겨진 까닭은 무엇일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오빠(태병·동정의 외아들·사망)는 아버지의 삶을 인천에 남기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인천에서는 어느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빠는 1997년 아버지의 제자(대전대 서예과 정태희 교수)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전대에 모든 작품과 유품을 기증했습니다.” 동정의 큰딸 용병(53·서예가)씨가 설명해 줬다.
용병씨는 “아버지의 작품과 유품이 대전으로 옮겨질 당시 인천문화원 원장을 비롯 많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인천은 예술인을 천시하는가'라고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정은 1925년 4월 강화도 내가면 황청리에서 아버지 동관(東觀) 박헌용(朴憲用)과 어머니 유(柳)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동정은 6세때 한문과 궁체에 조예가 깊은 할머니 변(卞)씨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다.
할머니가 동정에게는 첫 스승이었다. 2년 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동정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서예를 배운다. 동정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며 강화도 역사책인 강도지(江島池)를 간행한 문필가였다. 서예에 있어 가학(家學)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이처럼 학식을 겸비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은 동정이 서계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정이 15세 되던 해 동관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와 홀로 남겨진 동정은 1939년 가정형편상 학교를 포기하고 독학으로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동정의 서예활동은 국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로서는 국전을 무대로 활동하는 것이 서예가로서 가장 비중있는 활동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1953년 제2회 국전 서예부문에 입선하면서 서계에 이름을 알렸다.
58년부터 60년까지 연3회 국전 서예부문 특선과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 국전 추천 초대작가를 거쳐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서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 사람들은 그를 '국전선생(國展先生)'이라고 불렀다.
'일필휘지(一筆揮之)'.
동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제자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은 동정의 예술적 기질을 이처럼 표현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붓과 먹, 종이만 있으면 즉석 휘호도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기초가 튼튼했다는 것이다.
도진씨는 “선생님은 작품활동을 하면서 망설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면서 “비슷한 나이의 서예가와 비교하면 족히 10년은 성숙한 작품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동정의 지역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지역문화예술의 부흥을 위해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을 시작으로 예총 경기도지부장을 5차례 역임했다. 1971년에는 인천문화원장도 맡았다. 지역 문화부흥을 위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동정은 그의 첫 개인전을 고향 땅 강화도에서 열었다.
동정은 당시 경기일보(단기 4291.12.13)와의 인터뷰에서 “문화의 혜택에 굶주리고 예술을 감상 음미할 기회가 드문 메마른 땅에 나의 예능 발표가 다소나마 영양소가 될까 하는 희구(希求)에서도 쾌히 결정하였던 것이다. 나의 전시가 강화(江華) 초유(初有)의 미술행사라고 하니 얼마나 문화의 혜택이나 행사에 굶주려 왔는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술회했다.
동정의 후진양성활동은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손꼽힌다. 그는 65년 당시 중구 내동 창제한의원 2층에 동정서숙(東庭書塾)을 마련하고 수십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청람과 월강 강난주, 무여 신경희 등이 그의 제자다.
동정은 부유하지 못한 탓에 개인 작업실이 없었다. 가난한 스승을 돕기 위해 무여가 자신의 한의원에 서숙을 마련해 줬고 동정은 이곳에서 제자를 길러냈다고 한다.
동정서숙은 매일 오후 7시 동정의 서예를 배우기 위한 제자들의 발길로 붐볐다. 동정은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스승이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동정의 막내딸 부곤(45)씨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반면 제자들에게는 관대하셨다”면서 “마음에 쏙 드는 제자들을 집에 데리고 와 잠도 재우고 밥도 손수 지어 먹이셨다”고 말했다.
동정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여름이면 깊은 산속의 사찰을 찾았다. 그 때마다 자연이 숨쉬는 산사(寺)에서 기이한 모양을 한 돌을 집으로 가져왔다. 이 때문에 동정의 집 마당과 베란다에는 수백여점의 돌이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용병씨는 “아버지는 오전 4시면 일어나 항상 수석을 관찰하면서 하루 일과를 생각했다”면서 “수석과 불교, 자연은 아버지의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고 말했다.
청람에 의하면 1974년 동정은 인천에서는 더이상 서예가로서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동정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연 개인전을 통해 얻은 돈 50만원을 가지고 서울 공평동에 서실을 마련한다. 보다 많은 활동을 벌이겠다는 목표에서다. 서울의 서실에는 제자 서너명이 함께 했다.
서실을 연지 꼬박 한해가 지났던가. 동정은 51세 되던 해인 1975년 2월의 어느 추운 날 새벽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두 딸을 불러내 안마를 받은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장 아끼는 제자 도진씨에게는 “내가 몸이 좋지 못해 오늘은 서울 서실에 나가지 못했다. 몸보신을 위해 돼지고기를 한근 사왔으니 이 것만 먹고 일찍 잘 것이다”라고 전화를 걸었다.
동정은 자신의 집 안방에서 숨을 거뒀다.
예술의 정점에 다다르지 못한 원망 때문인지 두눈을 감지 못한 상태였다.
[인터뷰] 박세림 제자 청람 전도진
“인천은 스스로 대한 민국 서예계를 이끈 거목을 버린 것입니다. 역사가 판단할 것이며 후세가 비웃을 일입니다.”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은 “스승의 서예 삶이 고향 인천으로부터 버림받고 대전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이 터져 몇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절이 지나고 사람이 잊혀진다지만 역사를 버려서는 안된다”면서 “선생님의 일생은 인천의 역사인 동시에 인천 서예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청람이 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동정 박세림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청람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동정과 처음 만났다.
“중구 관동,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동정서숙이 있었어요. 무작정 붓글씨를 배우겠다고 이곳을 찾았고 당시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습니다.”
그는 “선생님은 185㎝의 장신에 몸무게도 90㎏이 넘는 거구였다”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상 예를 중시하고 노력하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덧붙였다.
청람은 늘 동정과 함께 했다.
여름철 산사를 찾을 때는 묵동(墨童)으로 함께 했고 동정이 마지막 예술혼을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을 때도 함께 했다.
그러기에 스승의 자취는 청람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예술세계의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람은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스승의 서계가 대전으로 옮겨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유품이 지역에서 버림받은 채 종적을 감췄다”면서 “문화·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지역이라면 오히려 대접받는 곳에 스승의 자취를 남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김장훈·cooldud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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