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인물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8 11:17:20
인천의 인물 인천이야기
2007/03/27 21:28
<고 일(高 逸 : 1903-1975)>
서울태생이나 1903년 1살 때 부친인 영희를 따라 인천으로 낙향했다. 1915년 창영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서울 양정고보를 졸업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양정고보 학생의 신분으로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했고, 곧이어 곽상훈을 회장으로 하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 총무겸 문예부장을 맡아 활약했다. 학업을 마친뒤 1923년 연천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했으나 반년만에 반일동맹휴학을 지휘하고 퇴직했다.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부청 직원으로 취직했으나 일인 관리밑에 굽신거리는 것이 싫어서 일주일 만에 사직하고,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되었다가 1924년 최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하자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부터 그의 눈부신 기자활동과 함께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의 파란 많은 역정이 전개된다.
유치장 출입이 이 무렵부터 다반사가 되었고, 치안유지법에 걸려 4년간 영어생활을 치루기도 했다.
신간회운동을 한 1932년에는 북만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인천시립도서관장으로 취임했고, 인천신문의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다시 언론계에 복귀하여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조선,고려,한국통신인천지사와 시사,합동지사의 편집장을 역임하다가 6.25전란을 맞아 충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1년 1.4후퇴에서 수복해온 뒤 전시판 '대한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1954 주간 인천사 주필로 활약했다. 1960년 '인천신문' 논설위원으로 사설을 집필했고, 경인일보에 인천사를 연재했다. 1956년부터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4년 재위촉 되어 1971년 "인천시사" 가 간행되기까지, 향토인천 언론계의 선구적 존재로 또한 원로로 활동했다.
<고유섭(高裕燮 : 1905-1944) >
인천 용동 출신으로 창영학교와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및 미술사를 전공했다. 1930년 졸업과 함께 모교 미학연구소 조수로 발탁되고, 1933년 28세의 나이에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44년 향년 4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 미술사와 고고학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반일정신으로 충만한 개성에서 선생의 학문활동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 도시락을 허리춤에 달고 흰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전국의 유적지를 맨걸음으로 또는 먼지길을 달구지를 타고 조선으 아름다움을 탐구하려는 한 민족주의자의 영혼의 편력은 자강불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학구적 열정으로 황무지와 다름없는 조선미술사를 개척, 짧은 생애 동안 초인적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광복후 황수영을 비롯한 제자들에 의해 저작집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1948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조선탑자의 연구"가 간행되어 이 분야 연구의 고전이 되었고, 1949년에는 "조선미술문화사론"이 간횅되는 등 이후 10권의 저작이 나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30주기를 기념하여 1974년 문무대왕 해중능이 바라다 보이는 경북 감포와 선생의 고향인 인천의 자유공원 인천시립박물관 앞에 각각 기념비와 추모비가 서고 1980년 '우현미술상'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50주기를 2년 앞두고 1992년 9월 인천의 "새얼문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인천 송도에 새로 개관된 시립박물관 마당에 선생의 동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김정렬(金正烈 : 1907-1974)>
인천과 접경에 있는 경기도 소래 태생으로 1930년 서울 양정중학교를 거쳐 1933년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광복 이전까지 법원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광복 이후 서울 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판사를 역임하였고 1950년에 인천지원장과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법관으로 재직 중 1954년 제2대 민선 인천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재임중 인천체육회장과 한국 문화단체 인천지부위원장을 맡아 인천체육과 문화진흥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곧이어 제3대 민선 인천시장에 무투표 당선되어 국내 유일의 무투표 당선 시장이 되기도 하였다.
4.19의거 후 제2공화국출범과 함께 심계원차장에 선임되고 고등고시 전형위원이 되기도 하였으나 5.16혁명 이후 관계를 떠나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리하여 1966년에는 서울 제2변호사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정계에 뜻을 두어 1967년 인천에서 민정당으로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간의 국회의원직을 마친 이후 그는 1974년년 67세로 작고할 때까지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그가 1974년 작고하자 인천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하상훈에 이어 두번째로 향토사회장으로 치루었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모두 각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김활란(金活蘭 : 1899-1970)>
인천에서 출생하여 영화여자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마치고 1922년까지 동교 예과 및 고등과 교수로 있다가, 1924년 미국에 유학 웨슬리언대학과 다음 해 보스턴대학원을 마치고 워싱톤에서 개최된 "세계여자기독청년회의"에 참가했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교수를 지냈고, 1931년 콜럼비아 대학원을 마치고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이화여전 교장을 맡음과 동시에, 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했고,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이화여자대학 총장겸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194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UN)총회에 참석했다. 이 해로부터 대한 여자기독교 청년연합회 재단이사장, 1950년에는 "여학사협회" 창립위원장 및 초대위원장, 1951년에는 전시국민외교홍보 전체위원장을 역임하고,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민간외교사절로 미국에 갔으며, 5월 웨슬리언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1953년 영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런던에서 열린 언론인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국제기독교 선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교수자격 심사위원,대학교육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55년 중앙교웍위원회 위원과 기독교방송국후원회 이사장,한국4H클럽부위원회 이사를 역임하고 1959년 대한적십자 부총재로서 일본거주 교포의 북송을 반대하기 위하여 제네바 적십자본부를 방문했다.
1961년 9월 이화 여자대학총장을 정년퇴임하고 명예총장겸 재단이사장만을 맡은 뒤인 1963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평생 독신을 지키며 한국 여성교육에 이바지한 공이 커 1970년 작고 후 정부로부터 1등 수교훈장이 수여됐다. 외국에서는 '닥터 헬렌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송수안(宋壽安 : 1903-1983)>
인천태생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가사를 돕느라고 만학을 하여 23세 때인 1926년에야 언진의숙고등과를 이수했다. 초기에 피복업에 뛰어들어 성가했으며 1938년에는 인천피복상 조합장이 되었고, 이로인하여 다음 해인 1939년에는 인천 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매일신보의 인천지사장을 맏게 되면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듬해에 광복이 되자 인천에서 선영사 인쇄소를 경영해 온 이종윤의 인쇄시설을 영입하여, 다음 해인 1946년 고주철을 사장으로 하고 스스로 부무겸 편집인을 맡으면서 이종윤을 인쇄인겸 편집국장을 맡게 했다. 1950년 9.28수복과 함께 "대중일보"의 제호를 "인천신보"로 바꾸고, 스스로 발행인겸 사장에 취임한 다음 이종윤을 부사장겸 편집,인쇄인으로 하였다.
1957년 경기도는 물론 호남전역으로 지세가 넓혀지자 제호를 다시 기호일보로 바꿨고, 1960년 경기미일신보로 다시 개제했다. 그러나 지방언론계에서 오랜 지령을 과시해 오던 동지는 1973년 9월 1일 1도 1사주의 정부방침에 따라 지령 제 9918호 발행을 끝으로 문을 내려버렸다.
<장 면(張 勉 : 1899~1966) >
정치가. 호는 운석(雲石)이며, 인천에서 태어났다. 1917년에 수원 고등 농림 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에 맨해튼 카톨릭 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에 서울 동성 상업 학교(지금의 동성고) 교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정치에 참여하여 과도 정부 입법 의원과 제헌 국회 의원을 지냈고, 1948년에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활약하였다.
1955년에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 위원이 되었고, 자유당 독재 정권과 맞싸우는 야당 지도자로서 이듬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4·19 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 책임제인 제 2 공화국 국무 총리가 되어 자유를 존중하는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도리어 무질서 상태에 빠져 5·16 군사 혁명으로 9개월 만에 물러났다.
<유희강(柳熙綱 : 1911-1976)>
인천 서곳 출신으로 엄격한 집안에서 일찍부터 한학을 했다. 1937년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동방학회에서 서화와 금석학을 연구했고, 1943년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인천 미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52년에 이경성, 박세림, 장인식등과 함께 대동서예연구회를 조직, 서화연구의 활성화를 기했다.
1953년 이래 국전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으며, 1959년부터는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2년 인천교대를 시작으로 홍익대와 서라벌 예대에 출강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1964년부터는 일반에게 알려진 검여체서풍의 완성단계에 들어가 1975년 "검거 유희강서예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197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김은호(金殷鎬 : 1905-1944) >
인천 문학태생으로 1906년 15세 때 스스로 서당공부를 중단하고 인천 관립일어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집안이 파산하자 일어학교를 중퇴하고 인천 사립 인흥학교 측량과에 입학, 1908년 졸업했다. 이듬 해에 부친이 억울한 옥고를 치루고 쓰러지자 패가한 집을 정리, 서울 남내문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 참혹한 생활을 해가며 일자리를 구해 다녔다. 이발소 잡역에서부터 제화공에 이어 임시 측량기사로도 다녔다. 그러다가 서울 모처 개인 저택에서 동양화 한폭을 감상하고 충격을 느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12년 서예가 현채와 문사 김교성의 소개로 당대의 대가 중 쌍벽인 안중직가 조석진이 주도 하는 경성서화미술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뛰어난 화재를 확인시켜 교수진을 놀라게 했다.
1915년 서화미술원 3년과정을 이수하고 미술전람회에 세필화 "조선의 가을"을 출품하여 포상을 받고, 창덕궁의 하명으로 이왕 전하의 대원수군복차림을 완성시켜 어용화가의 영광과 명성을 획득했다. 1926년 일본 동겡에 체류하여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이 되었으며, 제국미술전에 출품, 전통화로서 처음 입선했다.
1928년 제 7회 조선미술전시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했고, 같은 해 "동경동양화회화전"에 출품하여 1등상을 탔다. 1939년 남원 춘향묘의 "춘향의 상"을 비롯하여 이충무공상, 논개상, 운중근상, '엘리자베드'여왕상을 그렸으며, 1961년 제 10회 국전심수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 대통령의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65년 3.1문화상 본상을 수상했고,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박세림(朴世霖 : 1925-1975)>
강화 출신으로 사숙에서 한학과 서예를 수학했고, 동양한의대를 중퇴했다. 1947년 단독으로 "대동서연회"를 조직했고, 1952년 유희강,장인식과 함께 인천서에진흥운동에 전력했다. 1953년 위의 두 사람과 같이 국전에 출품하여 연 5회에 걸쳐 입선을 하였고,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연 3회에 걸쳐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국전추천작가로 선임되었다. 1965년년에는 국전초대작가가 되어 1972년까지 연 5회에 걸쳐 심사위원을 , 제20회 국전에서는 서예분과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부터 연 5회에 예총경기도지부장에 선임되어 지방문화의 육성발전에도 전력했다. 또한 1970년 인천교육대학을 시발로 하여 인하대 서예반을 지도하여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1958년부터 1974년까지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60년 이후로는 '동정서숙'을 개설 운영하여 이 곳에서 신경희와 전도진을 길러냈다.
<서일성(徐一星 : 미상-1950)>
인천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한국 신극단인 토월회에 참가하여 이백수, 윤심덕등과 활동했다.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여 서울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연국활동에 매진했다.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등과 함께 극단 '아랑'을 창단하고 재출발했다. 그러나 1950년 6.25사변 때 인천 주안에 거주하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살당했다.
일제 때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무대에 홀로 서 있어도 온무대가 꽉차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저명한 일본인 연극평론가의 격찬을 받기도 했다.
출연 작품으로는 "부활, 버어너드 쇼의 "오로라", "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민족"등이 있다.
<정 암(鄭 岩 : 미 상)>
인천 태생으로 초창기 조선배우학교 출신으로서, 1906년 인천에 사립 인명학교를 설립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부를 이끄는 등, 친일세력과 맞싸우고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이 된 박영효를 저격하려다 실패하자 애국시 "사상팔변가"를 남긴 채 권총 자결한 애국열사다. 정재홍선생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종원이며 정암은 예명이다. 일본 전위좌연극연구소에서 연극 연마를 했고 귀국하여 토월회와 낭만좌에서 연극활동을 했다.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다음 고려영화제작소를 창설하고 "쌍옥루"를 무성영화로 찍었으며 이 때 출연까지 겸하여 정식 여화배우로 투신했다. 1926년 지방연극 발전을 꾀하는 뜻에서 무대장치가 원우전과 언론인 고일 등을 규합하여, 희극작가 태우촌을 필두로 칠면구락부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운동에 크게 기여했고, 이로한 전통이 밑바탕이 되어 현재 인천출신 연예인이 다수 배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8.15해방 직전에 황용문,임근수등과 "포인극장"을 만들어 활약하기도 했다. 출연 작품은 '햄릿', '상하의 집', '춘향전', '칼멘', '사랑의 주검', '눈물의 빛', '스테파노의 죽음' 등이 있다.
<정용복(鄭龍福 : 1910-1977)>
충남 서산 출신으로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왔다. 인천상업학교를 나온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을 졸업했다. 경동 싸리재에서 미곡상을 하여 부자가 된 부친의 많은 유산이 있었지만, 평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했다.
반평생을 체육계에 투신하여 보이스카웃과 체육계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우선, 1945년에서 1955년에 걸쳐 '한미친선위원회'의 힘을 빌어 도원동에 위치한 인천공설운동장과 야구장의 재건보수공사를 실시하여 운동장의 면모를 갖축게 하였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인천체육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에 1960년 까지는 경기도체육회 이사장으로 경기도의 체육진흥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태우촌(泰雨村 : 미상)>
인천태생으로 본명은 종혁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1920년대 서울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물산장려회 회곡 작품 모집에 응모, 희곡 "암탉"이 입선되어 희곡작가로 인정되어 등단했다. 조부 태학명이 구한국시대의 관비 유학생이었고 부친 태수는 1895년의 신학제포고와 함께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인천해관(세관)의 통역을 맡아했다.
1962년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과 무대장치가였던 원우전, 언론인 고일등과 칠면구락부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한편, 동인지 습작시대를 간행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암탉", "두뇌수술", "춘향전"각색, "피를 파는 사람들" 등이 있다. 지방에서 초창기 한국 희곡작단의 선구적 역할을 해낸 업적이 큰 뜻을 지닌다.
<채 활(蔡 活 : 1909-1970)>
함경북도 태생으로 1928년 간도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전까지는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광복 이듬 해 월남하여 인천에서 협신정미소를 경영했다. 6.25전란 이후인 1951년에 협신화학공업소를 일으켰고, 1956년경인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5.16혁명 뒤 언론기관이 정비될 때까지 이끌어 나갔다. 1959년에는 조선삼공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또한 이해에 인천곡물협회장을 역임했다.
이 곡물협회장을 발판으로 지역사회 성공진흥활동에 뛰어들어 1960년 인천시 종합개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1965년에 인천상공회의소 제 5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68년에 제 6대 회장으로 재선됐다. 또한 1966년에 인천수출산업공단을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을 활약했으며, 같은 해 인천기계공업단지와 인천비철금속단지를 부평일대에 조성하는데 공헌하는 등 인천상공업계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황광수(黃光秀 : 1900-1971)>
서울 출신으로 서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금산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을 시발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1920년 인천의 문학국민학교에 부임하면서 인천교육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37년 왕징국민학교에서 교장이 되어 시흥국민학교를 거쳐 1945년 부평동국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약 8년간 외유하기도 했지만, 공복이후 작고할 때까지 생애의 3분의 2이상을 인천교육계를 위해 헌신했다.
1945년 광복 후 인천부의 초대 학무과장으로 추임하여 공백기의 인천교육을 수습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고, 1951년 전란시에는 학무과장과 사화과장까지 겸하기도 하였다. 1952년 교육청이 시에서 분리되자 초대 교육감으로 취임하여 2대 교육감까지 지냈다. 1960년 잠시 교육계를 떠나기도 하였으나 1962년에 인천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1964년에는 인천시 교육청 교육장을 복귀, 1965년 정년때까지 복무했다.
1966년에는 "경기일보"를 창간, 초대사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인천시 행정주문 위원과 경기도 행정주문위원장에 추대되어 행정의 자문역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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