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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길영희 선생 3.1운동 관련 판결문 발견

by 형과니 2023. 4. 7.

길영희 선생 3.1운동 관련 판결문 발견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4-14 01:31:45

 

청렴 강직한 교육자상의 표본으로 추모되는 고 길영희 선생이 경성의전 재학시절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 실형을 받은 사실이 제자들의 노력 끝에 세상에 알려졌다.

 

길영희선생 기념사업회1일 인천시 중구 제물포고교 교정에서 가진 제21주년 길영희 선생 추모제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길영희 선생이 1919년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의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 일제의 의해 체포돼 실형을 받았다는 판결문을 입수해 이를 헌정한 것이다.

 

길 선생이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제자들 사이에서는 당연시 했던 일이지만 이를 문서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박명훈(44·제고 24, 동방S&C 전무)씨는 고인에게 바치는 헌사를 통해 길 선생이 19193·1독립운동에 대한 재판기록과 판결문을 정부 기록보관원에서 발굴했다판결문 복사본이나마 고인의 영전에 헌정한다고 밝혔다.

 

정부 기록보관원에서 입수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3·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학생대표 길영희(당시 19)에 대해 징역 6개월, 징행유예 3년을 언도한다고 적혀 있었다.

 

판결문 발굴에는 제자들 사이에 회자됐던 선생의 항일운동이 기초가 됐다.

 

제자인 인천일보 오광철(69) 주필은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임종을 유일하게 지켜봤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던 터여서 항일운동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20여년간 선생의 항일운동 행정을 추적해온 심재갑 전 제물포고 총동창회장은 선생은 단 한 차례도 항일운동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기념사업회 활동을 하면서 이력에 이상한 점을 느껴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실제 길 선생은 1919년 판결 이후 경성의전에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5년간 이력이 전혀 없다.

 

이는 집행유예 이상의 실형을 받을 경우 5년간 공민권(公民權)의 제한, 지금으로 말하면 자격정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심 회장은 설명했다.

 

5년이 지난 뒤 길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 일본 히로시마 공립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에는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했다.

 

판결문 발굴에 나선 박명훈씨는 심 회장님의 조언과 이대복(56·제고 12, ()아가 월드 이사) 선배의 도움으로 기록보관원에 보관중인 3·1독립운동 사건 판결문을 뒤져 길 선생님의 항일운동 기록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판결문을 기초로 심 회장은 국가보훈처에 선생의 서훈을 신청했고 이번 3·1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심 회장은 선생의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 만큼 이를 시작으로 항일운동에 대한 조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칭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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