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운하
경인운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7-12 22:57:30
경인운하
미추홀
조선은 무도(無道)의 나라였다. 가급적이면 길을 내지 않았다. 대륙과 해양의 틈바구니에 끼어 수없이 외침을 받았고 그 때마다 길이 오히려 적을 돕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닦을 줄 몰라 안 닦은 게 아니었다.
연행기를 비롯한 여러 기행문에는 "중국의 길은 숫돌과 같다"거나 "길과 수레가 규격화되어 있어 지방까지 그대로 달릴 수 있다"며 부러움을 표하고 있지만 경제적 이득보다는 유사시 나라의 존망이 더 큰 문제였다.
길이 엉망이니 물자 수송은 자연히 바다나 강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세곡(稅穀) 운송 이었다. 세금으로 받은 쌀과 보리 등을 서울까지 안전하게 나르는 일은 조정의 중대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곡이 수장되면 금세 나라가 휘청거릴 만큼 재정 상태가 빈약했던 조선이었는데, 물살이 센 강화 손돌목에 이르러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하는 예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굴포(掘浦)를 파자는 안이 나왔다.
요즘말로 '운하'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손돌목을 지나지 않고 인천 앞바다에서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를 생각했던 것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에 이어 3백년 뒤인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도 시도했으나 결말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조선총독부도 경인운하를 계획했었다. 그 후 1956년 미국 기술단의 타당도 조사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인운하는 엎치락뒤치락이다. 수백년 간 한다, 안한다 하며 그때마다 논란을 거듭해 온 경인운하의 역사적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운하 건설이 화두로 떠오른 오늘, 다시금 묻게 되는 질문이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