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람들의 생각

파꽃들의 향연을 위하여

형과니 2023. 4. 11. 08:15

파꽃들의 향연을 위하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7-12 23:04:19

 

파꽃들의 향연을 위하여

 

이해선 (소설가 / 인천작가회의 회장)

 

배다리(선교;船橋) 하면 배와 배를 나란히 잇달아 띄워 사람이나 물건을 건널 수 있게 했다는 지명의 유래부터 떠오른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큰 갯골이 있어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소리를 들으며 인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활기차게 넘나들던 곳.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각처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고, 1897년 경인철도 부설과 함께 철교 위를 달리는 경적소리마저 고단하지만 정겨운 삶의 숨결로 이어지던 곳, 배다리.

 

그뿐이랴! 우리나라 최초 사립학교인 영화학교, 인천 최초 공립학교인 창영초등학교, 기독교 여선교사 기숙사 건물, 1920년 문을 연 인천양조장 건물이 우각로 주변으로 포진해 있고, 인근에는 일본인 지배인의 노동착취에 분노해 파업을 일으켰던 성냥공장 조선인 노동자 150여명의 의기가 생생히 살아있는데, 이 모든 역사 문화의 산실이 송두리째 무시당하고, 배다리 사람들의 삶이 산산히 파괴당하는 처지에 놓이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한국전쟁 후, 헌책방들이 하나, 둘씩 이곳에 둥지를 틀며 한국 근현대사의 험난한 질곡들을 꼭꼭 담아둘 때, 허기를 채우듯 고서를 뒤적이며 평화로운 삶을 꿈꾸지 않은 이가 누가 있던가?

 

어느 날 오후 천천히 배다리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리는 한산하다.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 허름한 간판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없이 서글퍼 보인다. 서글픔의 그늘에 밀려 좁은 골목 안으로 무작정 들어선다.

 

그러나 오밀조밀한 골목 안 빛 바랜 여인숙 간판들 또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활기가 숨 죽인 적막으로 다가오는 것에 발길이 다시 밀린다.

 

몇 걸음 모퉁이를 돌아드니 키 큰 남정네라면 곧 이마를 부딪칠 것 같은 낮은 지붕의 토시살 구이 간판이 다가온다. 조금 열려진 미닫이 문 안으로 허름한 탁자와 간이의자가 시름에 겹다. 텔레비전 낮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주인 할머니의 무구한 표정을 훔쳐보다 이내 골목 밖으로 나온다.

 

바로 송림삼거리 로터리와 맞닥뜨린다.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행렬은 골목 안의 정적과 무료함을 무시한 채 속도계를 높이며 마구 달려가고 있다. 잠시 희뿌연 매연 속에 갇혀 갈 곳 몰라 한다. 발길이 다시 옮겨 간 곳은 헌책방 삼거리. 휑하니 비어있는 양조장 건물을 기웃거리며 우각로로 향하니 저만치 개코 막걸리 집이 보인다.

 

인천작가회의 동료들과 뒤풀이때 맛있게 먹었던 도토리묵무침을 생각하고 다가가니 출입문은 아직도 닫힌 채다. 저녁 무렵에나 문을 열 모양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이 시간대에 누가 성큼 찾으리.

 

우각로 언덕배기로 몇 발짝 향하는 지점에 걸음이 우뚝 멈춰지고 만다. 강철로 된 공사판막이가 날카롭게 눈 속을 찌르고, 그 너머로 파헤쳐진 시뻘건 황토흙이 두 눈을 어지럽힌다. 이것이 바로 "중구와 동구를 관통하는 신흥동 삼익아파트~동국제강 간 산업도로 건설" 현장. 가슴이 탁 막힌다.

 

굳이 이 길이 아니더라도 길은 많건만 어찌 개발 광풍은 이 조용한 동네를 휘저으며 동강내려 하는가?

 

순박한 주민들의 함성에 놀라 달려온 시장이 주민들 의사를 받아들여 대안을 만들고, 주민들과 합의하라는 지시를 내렸음에도 어찌 개발 악령들은 이 소중한 역사문화 유적지에 미친 자본의 축제를 벌이지 못해 안달인가?

 

핏물처럼 흩어진 흙덩이를 밟으며 반쯤 헐린 동네 한가운데로 다가간다. 낯선 방문자를 맞이하는 부서진 벽들과 빨랫대와 장독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러나 골목안 한 구석에서 소리없이 올라오고 있는 파잎들의 당당하고 꼿꼿한 기세를 본다. 파꽃들의 향연을 기어이 펼치고야 말 것 같은 시푸른 기세에 우각로 길을 힘차게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