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를 지키자
배다리를 지키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7-12 23:05:45
추억이 깃든 연못의 아름다움
릴레이 기고 배다리를 지키자
"외철로문을 돌아/배다리 파출소 옆 헌 책방 골목엔 아직도/두터운 세월의 먼지 뿌우옇게 덮고 누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허름하게 졸고 있다/몇 분 간격으로 해마다 잦아지는/경인 전철 소리에도 깨지 않고/드문드문 지나치는 행인들 발길에도 눈을 주지 않고/풍경도 오래 고이면 추억이 되듯/한 자리에 오래도록 쌓여 있고 싶기나 하다는 듯/흙먼지 자욱하게 피어오른 유리문 밖에서/文學思想이 녹슬어 허물어지고/現代文學이 강렬한 직사광선에 빛바래고 있는/헌 책방, 새 책도 더러더러 싸게 파는/……/ 털벅 새로 고인 풍경 하나/추억이 될까?" (졸고 <배다리에 고인 풍경, 혹은 추억 1994 여름> 부분)
문득 돌이켜 보니, 그게 벌써 이십여 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말 그대로 세상의 굴절이 쏜살같다. 나는 그때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다.
자유공원 아래에 있는 학교에서 부처산 아래 송림동까지 아침과 저녁을 어김없이 오가는 시계추였다. 그것은 매번 정해진 궤도를 따라 왕복 운동을 되풀이 하는 주기성과 관성을 띤 것이었다. 어쩌다 운이 좋은 날은 10번 버스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기도 했다.
워낙 그 시절 자체가 무겁기도 했지만, 행여나 그 궤도를 이탈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불온한 반역이었다. 그러나 미미하나마 나는 감히 반역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그곳은 바로 헌책방이었다. 배다리라는 곳이었다. 가끔씩 발길을 멈추고 <샛별 서점>이나 <아벨 서점> 같은 헌책방을 찾아 들어가 여유가 없어 사지도 못할 책들을 뒤적거리곤 했다. 산더미 같은 책들의 그늘 속에서 서성거리던 그 시간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마치 강압적인 감시를 피하여 숨어 즐기는 자유로움처럼 달콤했다.
그 후 삶의 세파에 밀려다니느라 그곳을 떠났으나, 실상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곳에 서 있곤 했다. 뿐만 아니라, 손때가 고색창연한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침을 꼴깍이며 밤을 지새우게 했던 벽초의 <임꺽정>, <춘원 전집>과 <김동인 전집>, 내 나이와 동갑인 민중서관 <한국문학 전집> 등 어렵사리 그곳에서 구입한 내 청춘기의 편린들이 지금까지도 서재에서 동거를 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 그곳에서 만나 교류를 했던 단골손님들이 지금은 문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저명인사가 되어 있으니 아마도 당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의 문화 사교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곳은 삶이 건조하다고 생각될 때 문득 찾아가 잠시나마 일상을 풀어 놓고 앉아 마음이 촉촉이 젖도록 쉬어가는 장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풍경이 오래 고이면 추억이 되는 법이다. 바로 그곳은 오래 고인 풍경의 연못인 것이다. 그리고 어디 그것이 나만의 풍경이고 나만의 연못이겠는가.
"나 迷宮 속으로 들어가네/묵은 시간 다발 속으로/어둑스레한 골목길을 타고/구불구불 흘러드네/조금 기운 선반에서/손때에 덮인 한 꽃송이 뽑아드네/책방 안은 금세 꽃빛으로 환해져/사람들 그 빛으로 책을 고르고 나는/그 빛을 디디고 서서 주인이 흘려보내는 고전음악을/책갈피에 끼우네/ ……" (김정희 <아벨서점> 부분)
그런데 요즘 일각에서는 이곳에 오래도록 고인 풍경을 뽑아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배다리 한복판을 양분하는 대형 산업도로를 개설하고, 도시재생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기존의 거리를 쓸어버리고 초고층 건물들을 신축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것은 다 가치 없는 것인가? 무조건 지워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낡아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것도 있는 법이다. 개발은 우리네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투자여야 한다.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은 참다운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래도록 고여 있던 정겨운 풍경을 뽑아내는 일이라면, 그 대신 감동 없는 거친 풍경을 심는 일이라면 그것은 참다운 개발이 아니다. 굳이 산업화의 논리만을 내세우지 말고 오히려 더 많은 정겨운 풍경이 오래 고여서 메마른 마음을 적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뜩이나 척박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의 터전 인천에도 한 군데 쯤 진정 그런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배다리 같은 그런 연못이 말이다. / 조혁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