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의 주택을 찾아서

형과니 2023. 4. 14. 00:35

궁정건축가 사바찐의 주택을 찾아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8-09 17:46:23

 

궁정건축가 사바찐의 주택을 찾아서

손장원의 인천근대문화유산답사

 

인천에 세워진 근대건축물을 모아 작은 졸저를 발간한 뒤 그 책을 읽고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귀중한 정보를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세관100년사를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세관직원임에도 열정과 노력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이미 세관사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하고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를 주었고 그도 그동안 수집한 자료 몇 점을 주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薩巴丁, 薩巴珍, 薩巴玲, 士巴津)의 사인이 있는 1885719일로 기록된 인천해관(세관)문서(사본)였다. 그 서류에는 그가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영국, 독일, 미국의 국기를 그려 주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즉 그 문서는 그가 건축을 배워 국기를 그릴 정도의 그림실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문서를 읽다가 작년에 발간한 책을 쓰면서 의문으로 남았던 사바찐이 살았던 주택문제를 다시 떠 올리게 되었다. 사바찐은 상해에서 뮐렌도르프(P.G. von Mllendorf)를 만나 23세의 나이로 1883917일 인천항을 통해 입국했으며 입국 당시 사바찐의 직명은 영조교사(營造敎士)였다고 한다.

 

사바찐의 사인이 있는 해관보고서(우측상단에는 ‘Chemulpo’라는 글자가 있으며 하단부에는 사바찐의 친필로 보이는 사인이 있다.)/자료제공 : 김성수

 

 

조선정부가 초빙한 건축가였던 그는 18884월 인천해관을 해직하기까지 인천에서 건축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동청해상기선회사 인천대리점 책임자로 근무하게 되는 18999월 말까지는 경복궁 옥호루에서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 건축물을 설계하거나 감독했다.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황성신문 1899114일자 잡보에는 그가 세창양행 내 가옥을 빌려 업무를 개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사바찐이 거주하던 세창양행 내 부속가옥은 세창양행 사택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인천에서 두 번 거주했다. 그 첫 번째는 1883917일부터 18884월까지이며, 두 번째 거주는 189911월부터 19042월까지이다. 그는 인천에서 활동한 최초의 정규 건축가로 대략 710개월간 인천에서 가족들과 거주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첫 번째 거주기간에 거주했던 건물에 대한 것이다.

 

 

개항기 인천에서 활동했던 우리탕, 라포르트, 메르젤, 맥코넬 등의 해관원은 물론 타운센드, 헨켈 등과 같은 외국상사 주재원도 인천에서 자신의 집을 짓고 살았다. 그들의 상당수는 독신으로 부임하여 일본인을 아내로 맞아 생활했지만 사바찐은 직접 건물을 설계할 수 있는 건축가라는 것 외에도 가족들과 함께 인천에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신의 주택을 세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밝힐 만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고 단지 그가 러시아로 돌아간 뒤 1908년 인천에서 사바찐의 재산을 경매하여 그 대금을 일본 나가사키에 위치한 홈링거양행 본사에 근무하던 그의 아들 뾰도르 사바찐에게 전달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즉 인천에 사바찐의 재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부터 이러한 정황과 가정을 전제로 그가 첫 번째 인천거주기간동안 거주했던 건물을 찾는 추론을 전개해 보려한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엽서나 도서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위에 위치한 한국회관(북성동 38번지) 터에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누가 기록한 것인지 그리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진엽서에 그 건물을 후등씨저(後藤氏邸)’라고 표기한 것이 있다.

 

사바찐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북성동에 위치한 한국회관 자리에 큰 규모의 건축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색 점선참조)/자료:인천부사

 

 

현재의 한국회관 일대는 조계지 설정 당시 해관용지였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추정한다면 그 건물은 해관사택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당시 해관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바찐이 거주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좀 더 비약을 한다면 사바찐의 주택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과 더불어 사진엽서에 표기된 후등씨저(後藤氏邸)’의 고토(後藤)가 변호사로서 조선매일신문사를 창간했으며 1933년 당시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건물을 사무실겸 주택으로 사용했던 사람을 지칭한 것이라면 또 하나의 추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고토는 1900년대 초기에 사바찐의 주택에서 살다가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건물로 1933년 이전에 이사했거나 두 건물 모두 그가 소유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바찐은 러일전쟁의 패망으로 19042월 인천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가 운영하던 동청해상기선회사 인천대리점 책임자인 동시에 러시아 인천영사관 직원으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대로 둘리 없었다. 사바찐과 그 가족은 러시아 영사를 비롯한 다른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프랑스 함선에 몸을 싣고 수에즈운하를 거쳐 흑해연안의 오뎃사에 내렸다.

 

 

그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다고 하나 이후의 행적에 대한 것은 기록이 없어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서양의 정규건축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7년 넘게 인천에서 활동한 그는 인천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좀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 인천에서의 보다 구체적인 활동내역은 물론 귀국 후의 행적이 밝혀지길 바란다.

 

* 필자는 재능대학 인테리어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해반문화사랑회의 인천정체성 찾기 운동에 참여했고 문화재청이 지원한 근대문화유산 지킴이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랜 준비 끝에 다시 쓰는 인천 근대건축’(간향미디어랩)이란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