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할아버지, 강광 화백
강화 할아버지, 강광 화백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0-23 02:02:42
강화 할아버지, 강광 화백
<유봉희의 그 사람이야기 >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올 때, 획 하니 멀리 떠날 수는 없으나 마음에 바람이 불 때, 나는 강화를 찾곤 한다. 가을의 ‘강화길’이란 얼마마한 축복인가. 실제 도착 시간을 떠나 초지대교가 들어서면서부터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다는 친근감마저 들기 시작한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강화를 찾았다. 강화문화원에 들러 자료를 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강화가 그리웠던 것이다. 초지대교를 넘자 확 트인 논들과 함께 마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초록이었고, 모두가 넘치는 풍요로움이었다. 목가적(牧歌的) 정서에 빠져든 유치한 감상미라 해도 어찌할 수가 없겠다.
그만큼 도시의 삶은 내게 무거웠고, 힘겨웠던 것이다. 강화대교를 건너야 강화문화원에 쉽게 당도할 수 있었지만 초지대교를 고집한 이유도 그러한 강화의 넉넉한 길들의 소리들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 위와 옆에는 늘 이야기가 살아 있다. 강화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연만이 아니라 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길과 함께 따라오는 데에 있다.
몇 년 전 한 월간 잡지의 편집을 맡았을 때, 「강화에서 온 편지」란 꼭지의 기획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도시 인천에서 살다 강화로 이주한 가까운 이웃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 보자는 것이었다. 끝내 잡지의 폐간으로 기획을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그 기획의 한 자락이 남아 있다.
그날도 나는 차를 몰고 가다 세워두고 한참을 길 위에 서서, 논길에 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막을 지나 장화리에 다다라서는 1년 반 전 작고한 시인 박영근 선배의「강화행」이란 시를 떠올리며 그가 얼마나 강화를 그리워했는지 추억해 보기도 했다. 나의 강화길엔 늘 사람들이 있다. 저 뜨거웠던 80년대가 지나고 힘들어 하던 시절 인천의 많은 청춘들을 불러들인 곳이 강화였다. 그 이전 가슴에 불을 뿜고 살았던 인천의 청춘들 어느 누가 강화를 주목했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10여 년 전 강화로 들어가 생명운동을 하는 강화 마리학교 교장 황선진 선배, 그리고 오리농법을 하면서 농민운동을 하는 김정택 목사님, 만화가 장진형 형, 화가 허용철 형, 만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나의 친구 박흥렬 등 참으로 많은 선생·선배·친구들이 강화로 들어갔다.
그들은 강화에 살면서도 도시 인천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강화에서 새로운 기운들을 도시 인천으로 길어다 주고 있다. 그래서 지친 도시의 인천 사람들이 강화를 찾고 그들을 찾는 모양이다.
강화문화원에서 자료를 받아들고 마리산이 당신의 정원이라 하시는 강광 화백을 찾았다. 인천대 부총장을 역임하시고 정년퇴임 후 강화로 거처를 옮긴 강광 화백은 그날도 햇볕이 가득한 집 마당에 앉아 계셨다. 얼굴은 이제 시골 할아버지처럼 구릿빛으로 변해있었다. 강화로 거처를 옮긴 이후 선생의 그림은 매우 밝아졌다. 그림만큼 선생의 정신과 몸도 맑아졌으리라.
그런데 그날의 표정은 영 밝지가 않았다. 차를 마시면서도 연신 인천의 소식을 물으신다. 강화도 인천이지만 도시 인천을 걱정하시는 강광 화백. 이제 강화 할아버지가 다 되어버린 선생은 떠나는 차 안을 바라보면서 한마디 하셨다. “언제 강화에 오면 보신탕 잘 하는 집 알아놨으니 들러보자구······.”
도시 인천사람들이 지쳐 보이는가 싶었다.
* 필자 유봉희 님은 63년 충남 대전 출생으로 인천시민신문 등 신문 문화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지역문화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현재는 도서출판 다인아트 대표로 다양한 기획출판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인하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을 수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