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 단군의 유적, 참성단
국조 단군의 유적, 참성단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07-10-23 02:04:57
국조 단군의 유적, 참성단
<전문가 기고 - 김상렬의 인천문화유산 돋보기>
참성단의 모습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檀君)의 등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의 활동무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으로 단군관련유적은 대부분 한반도 북부에 분포한다. 그런데 강화에 단군과 관련한 유적이 2곳 있다. 하나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전하는 참성단(塹城壇)이고 다른 하나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하는 삼랑성(三郞城)이 그것이다.
대동강 동쪽에 단군의 큰 무덤이 있다
단군은 우리 민족과 역사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고려시대 일연의 글에 처음 등장했지만 우리 민족이 단군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인 듯 하다. 어느 연구자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총 967회의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렇게 많은 외침을 굳건하게 이겨내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온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이러한 국난 극복의 힘은 우리 백성들의 단결력에 있었다.
고려시대까지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불교다. 그러나 배불숭유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있어 더 이상 불교는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족의 구심점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 국조, 즉 단군인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대동강 동쪽에 2개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단군의 무덤”이라고 전하며 단군이 우리 민족에게 뚜렷하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별을 제사하던 곳
참성단은 『고려사』 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면서 각종 문헌에 단군 관련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참성단은 참성대(塹城臺)·참성초단(塹城醮壇)·마리산초단(摩利山醮壇)·마니산초성단(摩尼山醮城壇)·마리산제성단(摩利山祭城壇)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왔다. 이 중 참성단이 가장 보편적인 명칭이다. 참성단의 한자표기도 塹星壇·塹城壇·參星壇 등 세 가지가 있다. 塹星壇이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에 등장하는 것이고, 參星壇은 영조대에 간행된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별을 가리키는 한자어가 들어간 것은 참성단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별을 제사하던 곳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參星은 서쪽에 있는 별자리이다. 가장 적합한 표기는 ‘참호를 파서 쌓은 성에 있는 제단’이라 풀이될 수 있는 塹城壇이다. 성종대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시기가 늦기는 하지만 가장 의미가 통하는 표기이다. 지리서나 사서에는 참성(塹城)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데, 이는 참성단의 약칭으로 보인다. 『고려사』『조선왕조실록』의 지리지에는 참성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참성이 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칠선녀의 군무
하늘 위에 땅이 놓여지다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므로 고조선시대에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기록에는 제사를 지내던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단군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이강이나 이색의 시에도 제단임은 긍정하나 축조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참성단의 축조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최초의 기록은 풍수사인 백승현이 마리산 참성에서 초제지내기를 건의해 왕이 제초를 거행하였다는 『고려사』 원종 5년(1264) 5월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참성단이 13세기 이전 어느 때인가 축조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백승현이 왕에게 마리산 참성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사실에서 당시 풍수사들이 국조 단군의 존재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단군 관련되는 것을 길지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단군과 관련 있는 평양을 중심으로 묘청과 조위총의 난이 이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면서 단군과 관련된 길지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마리산인 것 같다. 참성단이 단군과 연결된 것은 강화천도 이후 풍수도참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돌로 쌓아 만든 참성단의 높이는 10척이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근데, 단의 윗면은 각 6척 6촌이고 아래는 각 15척”이라고 한 것에서 참성단의 형태가 상방하원(上方下圓)임을 알 수 있다.
즉, 원형으로 쌓은 하단 위에 방형의 제단을 두었다. 方은 땅을, 圓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 위에 땅이 놓여진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64괘 중 태괘(泰卦)는 건하곤상(乾下坤上)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데, 이는 음양이 서로 교차하게 되면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단의 윗면을 7척 6촌, 단의 높이를 17척이라 하고 있어 앞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무너져 내린 참성단을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생겨난 차이로 보인다. 태종 11년과 세종 8년에도 무너진 기록이 있고, 인조 17년에 개수한 기록도 보인다. 특히, 숙종대 강화유수 최석항에 의해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칠선녀의 성화 채화
숙종 43년(1717) 5월에 당시 강화 유수 최석항이 마리산 참성단의 서북 양면이 반쯤 무너지고 동편 계단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 신묵에게 명해 보수했다는 내용을 참성단 동쪽 기슭 암벽에 새겨 놓았다. 이것이 지금의 인천시지정문화재자료 13호인 참성단중수비다.
남한 유일의 소중한 문화유산
참성단은 고려 이후 왕의 이름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강도시대 원종이 직접 제사를 주재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 관리가 왕을 대신해 제사하였다. 이 관리를 참성단행향사(塹城壇行香使)라 하였는데, 대언(代言)이 파견되었으나 때에 따라 정2품·정4품의 관리가 파견되는 등 특별한 등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향사는 참성단 아래의 재궁(齋宮)에 머물면서 재숙(齋宿;재계하고 하룻밤을 지냄)을 한 다음 제의를 거행하였다. 참성단의 제사는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봄·가을에 거행되는 정기적인 제사와 외적의 침입·한발이 있을 때 수시로 지내는 비정기적인 제사가 있었다. 또한 제사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제전(祭田)을 지급했다.
참성단은 국조인 단군과 관련된 것으로 남한에서 유일하게 인천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중요성을 국가도 인정해 1955년부터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덕분에 매년 가을 7선녀가 채화하는 장면을 대중매체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성단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적인 단편적인 검토만 있을 뿐이어서 참성단에 오를 때마다 지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필자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아무튼 단군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인 삼랑성에 대해서는 서구열강과의 첫 번째 충돌이었던 병인양요를 서술할 때 다루고자 한다.
* 필자는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운영위원,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