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정문, 숭례문
나라의 정문, 숭례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2-16 14:19:00
나라의 정문, 숭례문
미추홀
이 나라 민초들과 6백여년 간 애환을 같이해 왔던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이 처참하게도 잿더미로 화한 사건이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 때 건립한 이 문은 건국의 이상을 장중하게 표현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서울에서 가장 오랜 목조 건물로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남대문'이라 불렸는데 '지봉유설'에는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판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쓴 것은 남쪽 조산(祖山)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맞불로써 꺾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듯 문 자체에 화기가 있어 봄과 여름의 가뭄 때에는 문을 닫아 음기를 붙잡아 양기를 억제하였고 일단 비가 오면 다시 문을 열어 통행을 허가했던 화(火)의 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풍수사(風水史)를 고려해 문화재청이 특단의 대책을 세웠을 법한데 세종 때처럼 밤낮으로 파수꾼이 지키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부절(符節)이 맞아야만 열었던 단속은 커녕 소화기 몇 대가 화재 대비책이었다니 기막힐 뿐이다.
숭례문은 대대로 잘 지켜져 왔었다. 연산군 때, 하루는 선전관이 밤중에 성문에 가 봤더니 수문장이 이를 지키지 않아 그를 의금부에 보내 엄히 국문케 했고 광해군 때에는 문의 양쪽 돌에다가 흑적색 낙서를 했던 무뢰배를 엄단하고 있다.
역대 왕들이 숭례문 보존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이 문을 실제로 나라의 정문(正門)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전란 중에도 끄떡없던 나랏문을 경제대국 운운하면서 문화를 없이 여기다 잃고 말았으니 조상 볼 낯이 더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