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철의 전망차
피뫼의 만세운동
형과니
2023. 4. 23. 00:20
피뫼의 만세운동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03-11 15:50:07
피뫼의 만세운동
지난 1일 강화읍에서 있은 3·1절 기념행사는 여러 가지로 뜻깊게 했다. 특히 강화군내로 확산케 한 기미년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된 길상면 피뫼 마을을 부각시켰다. 지금은 길직리(吉稷) 혹은 피미마을이라 불리는 피뫼는 예전 피가 무성하여 농사짓기가 힘들었다는 마을이다. 길직리의 稷은 ‘피직’이어서 서로 연관이 있다.
아무튼 1919년 3월18일에 있었던 3·1만세 계획은 피미마을 기독교 신자가 주동이 되었다. 서울 상황을 전달받은 길직교회 유봉진 장윤백 등이 강화에서도 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해 독립선언서와 ‘강화인민에게’라는 궐기문을 인쇄, 장날이던 18일 오후 2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날의 시위는 읍내 장날 장마당에 나왔던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만세를 부르느라 마을단위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 재판에 회부된 45명 중 길직리 출신은 15명이었다.
독립운동사자료집에 의하면 강화지방 주동자 유봉진의 신문내용 중 길직리의 사전모의자 가운데 장윤백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그는 1880년 강화군 길상면 출신으로 젊어서 미국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3·1운동 참여로 일경을 피해 개성 일본인 집에 피신, 4개월간 숨어 혼란기를 넘겼으나 나머지 가담한 이들은 심한 옥고를 치렀다. 때문에 그는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는 못했다.
극심한 한해가 들어 모두 식량난으로 고통을 당할 때면 그는 죽을 쑤어 교인들과 허기를 면하며 가뭄을 극복했다. 이후 인천에 이주해 용동 큰우물에서 한의 ‘장윤백 약국’을 차리고 내리교회 장로로 있다가 1937년 창영교회 창립때 교적을 옮겼다. 1954년 75세를 일기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후손으로 10명의 목사를 비롯 장로 권사 등 100명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한편 당시 시위를 주동했던 박기천 강문호는 창영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화도면 시위를 주동한 김형주도 60년대 창영교회 장로를 지냈다.
3·1만세시위가 있은지 89년-그 3월을 다시 맞아 봄 햇볕이 쪼인다. 그러나 그 날과는 다른 따사로움이다.
지난 1일 강화읍에서 있은 3·1절 기념행사는 여러 가지로 뜻깊게 했다. 특히 강화군내로 확산케 한 기미년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된 길상면 피뫼 마을을 부각시켰다. 지금은 길직리(吉稷) 혹은 피미마을이라 불리는 피뫼는 예전 피가 무성하여 농사짓기가 힘들었다는 마을이다. 길직리의 稷은 ‘피직’이어서 서로 연관이 있다.
아무튼 1919년 3월18일에 있었던 3·1만세 계획은 피미마을 기독교 신자가 주동이 되었다. 서울 상황을 전달받은 길직교회 유봉진 장윤백 등이 강화에서도 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해 독립선언서와 ‘강화인민에게’라는 궐기문을 인쇄, 장날이던 18일 오후 2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날의 시위는 읍내 장날 장마당에 나왔던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만세를 부르느라 마을단위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 재판에 회부된 45명 중 길직리 출신은 15명이었다.
독립운동사자료집에 의하면 강화지방 주동자 유봉진의 신문내용 중 길직리의 사전모의자 가운데 장윤백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그는 1880년 강화군 길상면 출신으로 젊어서 미국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3·1운동 참여로 일경을 피해 개성 일본인 집에 피신, 4개월간 숨어 혼란기를 넘겼으나 나머지 가담한 이들은 심한 옥고를 치렀다. 때문에 그는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는 못했다.
극심한 한해가 들어 모두 식량난으로 고통을 당할 때면 그는 죽을 쑤어 교인들과 허기를 면하며 가뭄을 극복했다. 이후 인천에 이주해 용동 큰우물에서 한의 ‘장윤백 약국’을 차리고 내리교회 장로로 있다가 1937년 창영교회 창립때 교적을 옮겼다. 1954년 75세를 일기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후손으로 10명의 목사를 비롯 장로 권사 등 100명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한편 당시 시위를 주동했던 박기천 강문호는 창영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화도면 시위를 주동한 김형주도 60년대 창영교회 장로를 지냈다.
3·1만세시위가 있은지 89년-그 3월을 다시 맞아 봄 햇볕이 쪼인다. 그러나 그 날과는 다른 따사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