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이야기
월미도
벚꽃과 조탕 潮湯으로 이름난 조선팔도 최고의 유원지 월미도 月尾島
인천을 상징하는 가장이름난 명소를 꼽으라면 단연 월미도를 들을수있고 자유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수문식 독이 있는 인천내항 오른편으로 울창한 숲으로덮힌 작은섬이 바로 월미도인데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수식어가 나돌만큼 세상에 널리알려졌던 관광지로 또 근대 100 여년 한국역사의 현장으로 우뚝솟은 이섬은 말그대로예나지금이나 인천의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곳이기도하며 월미도는 인천의 역사 특히 한국의 근 현대사를 온몸으로 안고 있는곳이기도하다
월미도가 한국사의 중심에 떠오르기 시작한것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조선 고종3 1866년에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사건)1871년의 신미양요 辛未洋擾(조선 고종8 1871년미국군함4척이 강화해변에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킨사건)때 프랑스 미국함대가 닻을 내리고 그뒤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가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강화진 江華鎭을 포격하면서부터 였다
구미열강이나 일본이 서울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했고 그한강하구에 서울의 길잡이 처럼 서있는 월미도를 기점으로 삼을수밖에 없었기때문이며 그러한 풍운의 역사를 상징하듯 월미도는 특히 병인양요때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제Pierre Roze의 이름을따서 저들의 해도海圖에 로제섬이라고 표기한
수치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고 1882년 임오군란 壬午軍亂(고종19 1882 임오년에 신식군대양성과 군제軍制개혁에 불만을 품고 구군인舊軍人들이 일으킨 변란)당시 도망처나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월미도로 피신하여 동쪽해변의 샘물에서 마른목을 축였다는 "화방우물"의 오명도 갖고있다
1887년 일본은 우리정부와 월미도지도차입계약서 月尾島地所借入契約書를 쓰고 월미도를 찬탈의 표적으로삼았고 당시외국인의 토지소유는 개항장 10리밖에 허용되지 않았는데 10리 이내에서도 토지소유와 개간에는법적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외국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일본은 한국인 이름을 빌려 개항장 주변의 간석지와 황무지를 개발한뒤 소유하려고 무진애를썼던 그 대상지가 월미도였다
일본은 1891년 1월 매년 80원圓의 지세를 조건으로 우리정부와 월미도묘지 조차 계약체결을하고
1891년일본이 월미도를 군수기지화할계략으로 석탄창고와 군수시설을 설치하자 러시아도 이에 뒤질세라 1896년 석탄창고를세웠고 1902년에는 입출항하는 각국의 함선과 경의를 표하기위해 예포 禮砲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러일전쟁의 승리로 기세가오른 일본은 1904년 8월 월미도에서 다른 열강들의 세력을 몰아내기위해월미도에 있던 민가 50 여채와 묘지를 강제로 철거하고 일본은 1904년 까지 월미도를 완전히 자기들 해군기지로 만들었는데 이를 위해 월미도에있던 민가와 산소를 강제 철거시키고 소월미도를 군용품저장소로 만들어 나무다리를 가설하고 철도를그곳까지 연장하기로하며 일본은 월미도 산중턱에 순환도로를뚫고 도로변에는 벚나무 산에는 소나무를심어 섬전체를 가꾸어 1918년 풍치지구로 지정하기도했다
월미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1914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정했던 각국지계의 해체였고 일본인들에게 인천 전역에서 자유롭게 살수있도록 문을 열어준셈이며 더욱이 그해 9월 월미도는 인천에 편입돼 일본인들의 땅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조선총돋부는 1917년 4우러월미도 동쪽해면을 돌뚝으로 막아 1천 689평을 매립하도록 인천 선거주식회사에 인가했다
1918년 내항에도크를 건설하면서 한강으로부터 흘러드는 급한물살을 막고 아울러 월미도까지 나룻배에 의존해야만 했던 교통을 편하게하기위해 북성지구(현 대한제분앞)로부터 약 1km에 달하는 2차선 둑길 堤道를 축조하기에 이르며 충둘레4km 정도의 이작은섬이 널리 알려지게된것은 바로 이 둑길이 놓인후 철도국이 소형해수풀과 해수를데운 이른바 공동목욕탕식의 조탕潮湯을 만들고 이곳을 임해유원지로 개발한후부터였다
월미도 벚꽃놀이는 전국에서도 이름이나있었고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를개통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0년 4월 월미도 벚꽃놀이를 위한 경인선 화열차 花列車를 별도로 임시로 운행할정도였으며 인천의 승용자동차 영업의 효시였던 별부자동차부別府自動車部등이 밀려드는 인파를 나르기위해1924년 4월 월미도 왕복버스를 운행하기도 했고 왕복버스는 4월부터 10월까지 오전8시~오후 10시 까지 30분간격으로 운행했으며 인천우체국은 월미도에 자동전화를 설치해 돈벌이에 나설정도였다
당시 알려진 휴양지로는 원산의 송도원.부산의 해운대를제치고 월미도는 단연 전국최고의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봄에는 월미도 중턱을 지나는 순환도로에 만발한벚꽃놀이로 붐볐으며 여름에는해변가 수영장에 헤엄치는 인파가 들끓었다
그후 월미도는 민간업체로 넘겨져 해변가에 대형풀이 증설되고 밀물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있는것처럼 설계한 용궁각 龍宮閣이라는 일본식 요정도 생겨났으며1935년 무렵에는3층 목조 건물인 빈 濱호텔이 건립되어 많은행락객들이 찾아들기도 했고 월미도는 일본패망때까지 근 20년간 전성기를 누렸으며 해방후 이 유원지 시설을 종업원들이 인수 운영하다가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월미도 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도 보지못한채 6.25동란으로 공터가 되고말았다.
그후 월미도는 미군기지로 다시 우리나라 해군기지로 사용되었으며 1966년 건설부 고시로 도시계획상 자연공원으로지정된 이곳은 해군 기지이전과 동시에 다시 공원으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섬둘레를 돌수있는순환도로가 개방되어 있고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횟집과 카페등이 줄지어서 있고 놀이터가 자리하고있어서 경인지역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건조된 해상관광선 코스모스가 이곳 월미도에서 출발하여 서해물살을 가르며 약 20km를 순회하는1시간여의 해상유람은 월미도의 명물이 되었다
월미도는 월북작가 상허 이태준 尙虛 李泰俊의 소설 "밤길"의 무대가 됐던곳이다 이태준의 작품활동을 했던 일제식민지 시절에 월미도는 꽤 유명한 관광지였고 조선민중울위한 관광지는아니었으며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고있는 일본인들과 일제 관료들을 위해 월미도에는 오늘날의 해수탕이라 할수있는 조탕潮湯과 각종위락시설이 들어섰다 당시 경인선 철로가 연결되있었기에 인천과 서울을 쉼게 오갈수있는지척이었고 이태준더 무슨 연유여서인지간에 인천에 자주들렸을것이고 수천명의 하역 노동자들이 들끓고있는부두 주변에 조성된 공장지대 공장꿀뚝에서 솟구쳐 오르는 검은연기 가혹한 노동에찌든 노동자들에게 눈길을 뒀을것이다
서구문물의 유입로이자 근대조선의 관문였던 인천에서의 경험은 일본에서 유학시절을 보냈던 이태준에게도 새로운 인상으로 각인됐을터지만 소설가로서 이태준의 관심은 조선의 외면적인 성장에 있지 않았고 그는 인천의 부두와 월미도에서 식민지 근대화의 시련을 목격했고 일본자본에 의해 근대적 산업체재가형성되면서 발생한 조선 민중들의 궁핍하고 처절한 삶을 포착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민중의 비참한 삶을 문학적으로 구체화 한다
소설의 주인공 황서방은 날품팔이며 서울에는 행랑살이나마 아내와 계집애둘과 올해 본 첫아들 이렇게 딸린식솔들이 있고 황서방이 인천에 내려온것은 순전히 식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며 황서방은 집짓는공사장에서 날품팔이 일을 얻었지만 며칠지나지않아 지긋지긋한 장마를 만나 소설은 황서방이 비가 그칠날만 기다리며 월미도를 바라보는 장면부터 시작되는데 월미도 끝에 물에다 지어놓은 용궁각인가 수궁각인가는 오늘도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벌써 열나흘째 줄곧 그치지 않는비다 소설에 등장하는 용궁각은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 상류층의 유흥을 위해 바닷가 갯벌에 세워놓은 요정이며 오늘날 용궁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갯벌위에 건물을 세우기위해 쌓은 돌축대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고 오랜세월 짜디짠 갯물에 달고 닳았지만 붉은돌빛은 여전하다
용궁각터는 월미도에 위치한 대성목재 정문 왼편에서 볼수있으며 누각이 소실되고 돌축대 흔적만 남은곳에 조류에 밀려든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가 뒹굴고있고 당시 일본인과조선의 상류층이 보기에는 바다끝 물위에다 지어놓은 용궁각은 꽤나 운치가 있었을것인데 이태준은 바다위에 지어놓은 누각과 그곳에서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이는 일본인 지배계급을 바라보는 조선민중의 좌절감을 읽어낸다 황서방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한밤에 돌이 지나지않은 아들을 안고 포장도 되지 않았을 진흙탕길을 밟으며 길을 나선다 죽어가는 아이를 주인 朱安에 있는 공동묘지 근처에 묻기위해서 황서방이 아이를 안고서 비내리는밤길을 뚫고 가는장면은 숨이 멋도록 강렬하다
이태준의 "밤길"은 단지 조선 민중의 비참한 삶만을 그려낸것이 아니라 황서방의 짧은 여정속에서 인간의
절망과 비극을 축약하며 삶의 비정함을 시퍼렇게 날이선 비수를 들이대듯 불쑥 끄집어내고 있기때문이며 일본의 근대문학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꼈던 비정함을 훨씬 상회하는 삶의 비정함과 비극 분노와 좌절을 경험했던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헐떡이는 아이를 물구덩이에 생매장하는 장면은 삶의 비정함과 비극 분노 좌절이 뇌관처럼 응축돼있다
이거 왜 얼른 돼지지 않어.... 황서방도 분명히 꼴깍 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아직 목숨이붙었다 빗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간것을 게운것이다 제에길 파리새끼만두 못한게 찔기긴 으흐흐 이리구 삶 뭘허는게여 목석만두못한 애비지뭐여 저것 원술 누가갚어 황서방은 그만 길가운데 철벅 주저 앉자버린다 하늘은 그저 먹장이여 빗소리속에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뿐이고 소설속에서 황서방이 장맛비를뚫고나선 "밤길"은 오늘날의 배다리 우각로를 거쳐 독쟁이고개를 넘어가는 길이였을것이라고 한다 소설속 공동묘지는 주안 신기촌일대일수도있고
도호부청사가있는문학동쪽일수도있다 당시엔 그일대가 모두 공동묘지였으니까 소설 '밤길"에서 자신의 아기를 생매장하는비정함과 비극을 지금의 신기촌과 문학동 일대에선 느낄순 없다 다만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그림자에서 저마다 묻어있는 인생의 비극을 짐작해볼뿐이다
이태준의 "밤길"은 1940년 문장지에 발표된 짧은 단편으로 소설의 주인공 황서방은 서울의 행랑집에 아내와 두딸 갓낳은아들을 남겨두고 인천으로 내려와 월미도근처 집짓는 공사장에서 품팔이 일을 한다 그런데 황서방은 계속되는 장맛비로 일을 못하게되고돈을 벌기는커녕 빗만지게 된다
서울 주인집에서 주인이 찾아와 황서방의 아내가 아이들을 남겨두고 도망가 자신이 고생을 했다며 황서방의 귀쌈을 올려붙인다 주인은 정거장에 아이를 팽개치고 가고 황서방은 두딸과 젖을 못먹어 병이든 아들을 데리고 공사장으로 온다 갓난 아들은 죽어가고 돈이없어 치료도 못하는처지인 황서방에게 동료 권서방은 새로지은집에서 주인이 오기도 전에 아이가 죽는다면 공사장에서 당장 쫓겨날것이니 어차피 죽을 아이니 가서 묻어버리자고한다
황서방은 아이문제로 권서방과다투나 권서방의 생각에 동조하며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비내리는 밤길을 나선다 억수같이퍼붓는 빗속을 걷는 장면과 돌밭을 파고 빗물이 차오르는 구덩이에 아이를 묻으나 아이의 목숨이 채끊어지지 않고 토악질을 하는장면이 인상적이며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휘문고보와 일본 상지대학 예과를 다녔으며 구인회 조선문학동맹에서 활동했고 1946년 월북후 10년간 활동하다가 숙청돼 타의에 의해 절필할수밖에없는비운을겪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태준은 선명한 인물창조. 현대소설의 기법을 완벽하게 체득한작가 치밀한 곁구와 섬세한 분위기 창조, 낱말 하나를 바꾸어놀수없이 완벽하게 짜여진 구조와 정확하기 짝이없는 간결한 언어. 조각처럼 뚜렷하게 제시되는 성격의 제시와 인물표현. 그리고 그런 인물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흐르고 있는 유머와 페이서스 등 그의 단편은 어느구석에도 흠잡을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