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철의 전망차
일심당 효행표
형과니
2023. 4. 24. 08:20
일심당 효행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04-21 02:07:01
일심당 효행표
지난 12일 강화군 선원면 연동마을에서 일심당 황우삼 여사의 효행표 건립 기념행사가 있었다는 단신보도이다. 이번 행사의 의미는 효행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1922년생으로 1998년에 별세한 황여사는 연동마을에서 50년간 농사일을 거들면서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의 사표이다. 그로 인해 황여사는 경기도지사, 삼성문화재단, 성균관장 등으로부터 수많은 효행표창을 받아왔다.
역사의 고장 강화군에는 유독 효부 열녀가 많았다. 1976년 간행한 ‘강화사’에서 몇분을 소개한다.
김이황의 아내 윤씨=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육식을 않는 등 정성껏 집상했으며 시아버지가 8년간 병석에 있을 때도 병수발하면서 돈이 떨어지면 자신의 옷을 팔아 약값을 보태 마침내 완쾌하여 경상지방 첨사로 갈 수 있었다. 남편과도 사별, 그 뒤를 따르려 하자 “내가 죽으면 누가 거두어주겠느냐”는 애통에 자결 못하고 시아버지를 봉양했다. 강화유수가 효부로 표창했다.
고계춘의 아내 김씨=서도면 주문도에서 성장, 삼산면 매음리에 출가했으나 빈궁하여 길쌈으로 가계를 도왔다. 종기로 고생하는 시아버지의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는 등 치료에 지극하여 완쾌할 수 있었다. 이웃이 효부의 덕이라고 칭송, 관에서 부역을 면제했다.
조하준의 아내 문씨=15세에 양사면 교산리에 출가하여 18세에 남편과 사별했다. 의탁할 곳 없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시아버지가 상심, 득병하여 치료의 효험이 없자 뒷동산에 올라 백일기도로 완쾌케 했다. 60이 넘는 나이에도 80의 시부모 봉양하기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향교에서 표창했다.
차영석의 모친 정씨=볼음도에 출가했으나 남편과 사별, 시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겼다. 심화로 치매가 된 시어머니의 괴롭힘을 참으며 대신 죽기를 기도했다. 병들자 노인 탓으로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했는데 병 고쳐 무엇하랴면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 남편의 뒤를 따랐다.
세월이 가고 가치관이 변하여 전통 윤리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라도 여전히 옛 효심은 달라질 수 없다. 효행기념행사를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지난 12일 강화군 선원면 연동마을에서 일심당 황우삼 여사의 효행표 건립 기념행사가 있었다는 단신보도이다. 이번 행사의 의미는 효행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1922년생으로 1998년에 별세한 황여사는 연동마을에서 50년간 농사일을 거들면서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의 사표이다. 그로 인해 황여사는 경기도지사, 삼성문화재단, 성균관장 등으로부터 수많은 효행표창을 받아왔다.
역사의 고장 강화군에는 유독 효부 열녀가 많았다. 1976년 간행한 ‘강화사’에서 몇분을 소개한다.
김이황의 아내 윤씨=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육식을 않는 등 정성껏 집상했으며 시아버지가 8년간 병석에 있을 때도 병수발하면서 돈이 떨어지면 자신의 옷을 팔아 약값을 보태 마침내 완쾌하여 경상지방 첨사로 갈 수 있었다. 남편과도 사별, 그 뒤를 따르려 하자 “내가 죽으면 누가 거두어주겠느냐”는 애통에 자결 못하고 시아버지를 봉양했다. 강화유수가 효부로 표창했다.
고계춘의 아내 김씨=서도면 주문도에서 성장, 삼산면 매음리에 출가했으나 빈궁하여 길쌈으로 가계를 도왔다. 종기로 고생하는 시아버지의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는 등 치료에 지극하여 완쾌할 수 있었다. 이웃이 효부의 덕이라고 칭송, 관에서 부역을 면제했다.
조하준의 아내 문씨=15세에 양사면 교산리에 출가하여 18세에 남편과 사별했다. 의탁할 곳 없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시아버지가 상심, 득병하여 치료의 효험이 없자 뒷동산에 올라 백일기도로 완쾌케 했다. 60이 넘는 나이에도 80의 시부모 봉양하기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향교에서 표창했다.
차영석의 모친 정씨=볼음도에 출가했으나 남편과 사별, 시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겼다. 심화로 치매가 된 시어머니의 괴롭힘을 참으며 대신 죽기를 기도했다. 병들자 노인 탓으로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했는데 병 고쳐 무엇하랴면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 남편의 뒤를 따랐다.
세월이 가고 가치관이 변하여 전통 윤리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라도 여전히 옛 효심은 달라질 수 없다. 효행기념행사를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