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람들의 생각
아펜젤러의 축구와 인천
형과니
2023. 4. 24. 08:22
아펜젤러의 축구와 인천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8-04-21 02:09:27
아펜젤러의 축구와 인천
이원구 문화체육부장
지난해 SK와이번스의 우승으로 ‘구도’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천에 올들어 축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변변한 선수 보강 없이 용병 스트라이커를 타 구단에 내주며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가 정규리그 초반 돌풍이 무섭다.
속을 들여다 보면 창단 2년 신화 사령탑인 장외룡 감독이 돌아온 것 빼고는 스타급 선수도 없는 데다 별다른 전력상승 요인도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무명의 반란’이다.
여기에 지난 11일엔 인천유나이티드의 유소년팀인 대건고 축구부가 창단식을 가졌다. 대건고 축구부의 창단은 학교축구와의 대립문제를 떠나 선진형 클럽축구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창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분명한 건 모두가 인천축구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포석이라는 점이다. 이젠 인천축구가 학교축구와 클럽축구 사이에서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할 만큼 넓은 혜안을 가지게 된 셈이다.
지난 5일 인천에서는 아펜젤러 선교 123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의 출발지인 중구를 선교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키기 위한 대규모 선교문화축제가 열렸다.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탑에서 인천내리교회까지 선교사의 입항을 재현하는 대규모 거리행진도 가졌다.
인천은 19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890년 한국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탄생하는 등 그동안 한국 교회의 첫 출발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속에 한국 축구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1882년 6월,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가 제물포에 입항한 후 상륙허가를 받지 못한 선원들은 부두에 내려와 공을 찬 것이 한국 축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유럽축구가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 외국어학교에서다. 프랑스어 교사 에밀 마텔이 축구를 가르쳤다는 설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우고 축구반을 둔 것이 처음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에밀 마텔이 한국에 초빙된 것은 1905년으로 동소문 밖 봉국사에서 열린 프랑스어학교의 운동회에서 처음으로 축구시합을 한 것이 그해 5월이고, 배재학당의 축구반이 있었다는 것이 1902년이고 보면 분명 배재학당이 먼저다.
결국 123년 전 지금의 인천항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가 이 땅에 축구의 씨앗을 뿌린 주역인 셈이다.
당시 축구 경기의 모습도 무척 궁금하다.
월드컵 열기가 생생하게 남아있던 지난 2002년 10월, 국내 극장가에서는 그 열기에 도전장이라도 던지듯 한국 최초의 야구단을 소재한 영화가 개봉돼 눈길을 끌었다. 글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한 선비가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유일한 꿈이었던 암행어사 목표를 잃고 돼지 오줌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일과를 보내다 우연히 야구라는 신문물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생기는 휴먼 코미디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초창기의 축구경기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당시 축구는 상투에 망건을 쓰고 바짓가랑이를 새끼로 묶고 일정한 사람 수도 없이 양편이 동수이기만 하면 됐다. 경기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이 어느 한 편이 백기만 들면 끝났고 득점이 없으면 반칙의 다과로 승부를 가렸다.
이러다 보니 빈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축구장이 됐고 넓이와 규격은 물론 골포스트가 있을 리 만무하다. 훗날 Y자형 소나무 두 그루 세우고 가로막대 하나 얹은 것으로 흰 칠을 한 것이 전부라고 전해진다.
근래들어 종교계에서는 선교업적뿐 아니라 한국근대화 업적도 대단한 아펜젤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인천축구 역시 여기저기서 좋은 징조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때 야구도시로만 알려진 인천과 축구가 갖는 역사성을 조심스럽게 되돌아 보는 것도 신바람 나는 인천축구를 위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원구 문화체육부장
지난해 SK와이번스의 우승으로 ‘구도’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천에 올들어 축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변변한 선수 보강 없이 용병 스트라이커를 타 구단에 내주며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가 정규리그 초반 돌풍이 무섭다.
속을 들여다 보면 창단 2년 신화 사령탑인 장외룡 감독이 돌아온 것 빼고는 스타급 선수도 없는 데다 별다른 전력상승 요인도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무명의 반란’이다.
여기에 지난 11일엔 인천유나이티드의 유소년팀인 대건고 축구부가 창단식을 가졌다. 대건고 축구부의 창단은 학교축구와의 대립문제를 떠나 선진형 클럽축구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창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분명한 건 모두가 인천축구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포석이라는 점이다. 이젠 인천축구가 학교축구와 클럽축구 사이에서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할 만큼 넓은 혜안을 가지게 된 셈이다.
지난 5일 인천에서는 아펜젤러 선교 123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의 출발지인 중구를 선교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키기 위한 대규모 선교문화축제가 열렸다.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탑에서 인천내리교회까지 선교사의 입항을 재현하는 대규모 거리행진도 가졌다.
인천은 19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890년 한국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탄생하는 등 그동안 한국 교회의 첫 출발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속에 한국 축구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1882년 6월,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가 제물포에 입항한 후 상륙허가를 받지 못한 선원들은 부두에 내려와 공을 찬 것이 한국 축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유럽축구가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 외국어학교에서다. 프랑스어 교사 에밀 마텔이 축구를 가르쳤다는 설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우고 축구반을 둔 것이 처음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에밀 마텔이 한국에 초빙된 것은 1905년으로 동소문 밖 봉국사에서 열린 프랑스어학교의 운동회에서 처음으로 축구시합을 한 것이 그해 5월이고, 배재학당의 축구반이 있었다는 것이 1902년이고 보면 분명 배재학당이 먼저다.
결국 123년 전 지금의 인천항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가 이 땅에 축구의 씨앗을 뿌린 주역인 셈이다.
당시 축구 경기의 모습도 무척 궁금하다.
월드컵 열기가 생생하게 남아있던 지난 2002년 10월, 국내 극장가에서는 그 열기에 도전장이라도 던지듯 한국 최초의 야구단을 소재한 영화가 개봉돼 눈길을 끌었다. 글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한 선비가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유일한 꿈이었던 암행어사 목표를 잃고 돼지 오줌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일과를 보내다 우연히 야구라는 신문물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생기는 휴먼 코미디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초창기의 축구경기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당시 축구는 상투에 망건을 쓰고 바짓가랑이를 새끼로 묶고 일정한 사람 수도 없이 양편이 동수이기만 하면 됐다. 경기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이 어느 한 편이 백기만 들면 끝났고 득점이 없으면 반칙의 다과로 승부를 가렸다.
이러다 보니 빈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축구장이 됐고 넓이와 규격은 물론 골포스트가 있을 리 만무하다. 훗날 Y자형 소나무 두 그루 세우고 가로막대 하나 얹은 것으로 흰 칠을 한 것이 전부라고 전해진다.
근래들어 종교계에서는 선교업적뿐 아니라 한국근대화 업적도 대단한 아펜젤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인천축구 역시 여기저기서 좋은 징조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때 야구도시로만 알려진 인천과 축구가 갖는 역사성을 조심스럽게 되돌아 보는 것도 신바람 나는 인천축구를 위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