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독립시(獨立市)
형과니
2023. 4. 24. 08:25
독립시(獨立市)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4-21 02:16:47
인천, 부평, 강화는 서로 이웃한 도호부였다. 개항 전야인 1789년 인천의 인구가 1만4천600명, 부평이 1만1천600명, 강화가 3만4천200명이었던 것을 보면 농경사회였던 당시의 지역적 판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1883년 이후 인천은 개항장이 되면서 각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서구식 공원이 들어서는 등 근대 도시로 바뀌어 간 반면, 부평과 강화 지역은 대대로 이어온 고유 기능이랄 수 있는 농촌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07년 무렵에 이르러 인천의 인구는 과거의 배가 되는 2만7천265명으로 증가한 반면, 부평은 900명이 는 1만2천500명, 강화는 오히려 5천900명이 준 2만8천300명으로 나타나는 등 위상에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 세 지역은 그 후 일일이 들기 어려울 정도로 권역의 변동이 잦았으나 국제 항구도시, 군수 공장지대, 전통 농촌지역으로의 성격을 각기 지녀가면서 인천을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거점으로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 같은 순망치한의 관계를 발전시켜 오늘과 같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천광역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지난 날의 우리네 지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부평구'를 '독립시'로 만들자고 한다니 무슨 소린지 모를 일이다.
저 왕조시대의 '역사적 추억'을 새삼 들춰내 '독립'을 운운했거나, 인구 유입과 공장 세수가 늘었다는 현실적 이해로 '분가'하겠다고 했다면 그것은 오늘의 '부평구'를 있게 한 선대(先代)들과 지역사에 대한 '결례'인 것이다. 어느 지역들처럼 사람 가려 살지 않았던 양속(良俗)에 공연한 분열의 불을 붙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1883년 이후 인천은 개항장이 되면서 각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서구식 공원이 들어서는 등 근대 도시로 바뀌어 간 반면, 부평과 강화 지역은 대대로 이어온 고유 기능이랄 수 있는 농촌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07년 무렵에 이르러 인천의 인구는 과거의 배가 되는 2만7천265명으로 증가한 반면, 부평은 900명이 는 1만2천500명, 강화는 오히려 5천900명이 준 2만8천300명으로 나타나는 등 위상에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 세 지역은 그 후 일일이 들기 어려울 정도로 권역의 변동이 잦았으나 국제 항구도시, 군수 공장지대, 전통 농촌지역으로의 성격을 각기 지녀가면서 인천을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거점으로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 같은 순망치한의 관계를 발전시켜 오늘과 같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천광역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지난 날의 우리네 지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부평구'를 '독립시'로 만들자고 한다니 무슨 소린지 모를 일이다.
저 왕조시대의 '역사적 추억'을 새삼 들춰내 '독립'을 운운했거나, 인구 유입과 공장 세수가 늘었다는 현실적 이해로 '분가'하겠다고 했다면 그것은 오늘의 '부평구'를 있게 한 선대(先代)들과 지역사에 대한 '결례'인 것이다. 어느 지역들처럼 사람 가려 살지 않았던 양속(良俗)에 공연한 분열의 불을 붙일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