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철도를 부설하자고 맨 처음 제안한 이는 미국 주재 대리공사 이하영이었다. 미국의 신식 문물에 쇼크를 받은 그는 1889년 귀국하자마자 화륜거(火輪車·기차) 모형을 들고 황제를 알현해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후 조선은 자력으로 철도 건설을 시도했으나 기술력과 자금 부족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이를 노리고 있던 일본을 견제할 요량으로 부설권을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에게 넘겼는데, 그 역시 자금난으로 고전했다.
이를 틈탄 일제는 1898년 토목 공사를 절반 정도 끝낸 모스에게 부설권을 인수해 자국인들끼리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세우고 공사를 속개, 1899년 9월 18일 인천역(仁川驛)에서 대대적인 개통식을 갖고 인천~노량진 간의 영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사단(事端)이었다. 애당초 모스가 계획한 노선은 지금과는 달리 기공식을 거행했던 우각리(牛角里·숭의동)에서 도산정(桃山町·도원동)을 거쳐 해안가를 끼고 인천신사(仁川神社·현 인천여상) 앞에 이르는 것이었다.
지금 봐도 모스의 안은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야욕에 눈이 어두웠던 일제는 앞뒤 안 가리고 공사의 편의만을 택했다. 최근 일부 식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운운하지만 식민지의 장래를 걱정한 '은혜의 제국'은 없었던 것이다.
인천은 결국 경인선에 의해 철저히 양단되었고 그로 인해 동서 간의 인적·물적 교류의 제한은 물론 정상적인 도시 발전을 꾀할 수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반신불수로 긴 세월을 지내왔던 셈이다. 지난 주 이를 개선하자는 철도 노선의 지하화가 제기됐다는 소식이다. 뒤늦었지만 기필코 시행해야 할 사안이다./조우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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