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정암(鄭巖)
연극인 정암(鄭巖)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9 09:04:09
초창기 인천 연극의 한 봉우리 정암(鄭巖)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또 한 명의 인천 연극인 정암을 소개한다. 『인천시사』나 그밖의 글들에는 흔히 그의 이름이 정암(鄭岩)으로 쓰여 있는데 실상은 동일인이다. 암(岩)은 암(巖)의 속자로 쓰이기 때문이며, 당시 신문 등에는 모두 정암(鄭巖) 정자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 정암이라는 이름도 예명이다. 본명은 정종원(鄭鍾元)이다. 먼저 『인천시사』의 기록을 보자.
“정암(鄭岩 : 생몰 미상)은 인천 태생으로 초창기 조선배우학교(朝鮮俳優學校) 출신이다. 그는 19세기 벽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인천지부를 이끌며 친일 세력과 맞싸우고, 일진회(一進會) 회장 박영효(朴泳孝)를 저격 응징하려다 실패하자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를 남긴 채 권총 자결한 애국열사 정재홍(鄭在洪) 선생의 둘째 아들이며 본명은 종원(鍾元)이고, 암(岩)은 예명이다.
▲ 낭만좌 일동
일본 전위좌(前衛座) 연극연구소에서 연기 연마를 했고, 귀국하여 토월회(土月會)와 낭만좌(浪漫座)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또한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쌍옥루(雙玉樓)」를 찍었으며, 이때 출연까지 겸하여 정식 영화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하였다. 1926년 지방 연극 발전을 꾀하는 뜻에서 희곡작가 진우촌(秦雨村)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 고일(高逸) 등을 규합하여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출연 작품은 「햄릿」 「상하(上下)의 집」 「춘향전」 「칼멘」 「사랑의 주검」 「눈물의 빛」 「스테파노의 죽음」 등이다.”
대부분이 진우촌이나 원우전을 이야기할 때 인용된 내용이지만, 인천 출신 다른 문화 예술인에 비해서는 활동상을 비교적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배우학교 출신이며 일본 전위좌(前衛座)연극연구소에서 수업한 정암 씨가 토월회에서 윤심덕 양과의 역사적인 공연을 한 것은 그녀가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를 만들고, 대한해협(일본명은 현해탄) 깊은 물속에 빠져 자살하기 전이어서 또한 인상적이다.
정암 씨는 인천 개항 후 광무 연간에 사립학교 인명의숙의 설립자이며 박영효의 암살 계획을 추진하다가 「사상팔변가라」는 노래를 남기고 자결한 지사 정재홍 씨의 둘째 아드님이다. 그는 무대극 이경손 각색 「동도(東道)」에서 아버지 역으로 나왔었다. 약 30년 전, 부민관에서 열린 동아일보 주최 제1회 연극콩쿨대회에서는 극단 <낭만좌>의 단원으로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했으며, 제2회 콩쿨대회에서는 박향민 작 「상하의 집」에 출연한 노련한 무대 배우였다.
▲ 낭만좌 공연장면
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고려영화제작소>를 창립하였고, 중외일보 주간이던 이상협 씨가 일본의 가정 비극 소설 「나의 죄」를 우리말로 번안한 소설 「쌍옥루」를 각색해 만든 무성(無聲) 활동사진에서는 어부로 출연하였다. 또 청춘 남녀 사이에서 그 주제가가 크게 유행되었던 영화 「낙화유수」의 주연으로도 데뷔한 일이 있는 등 맹활약을 보인 정암 씨가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옴에 따라 인천의 연극 운동은 활짝 꽃을 피웠다.
인천의 극(劇) 연구와 공연 단체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칠면구락부>의 출현이다. 그 부원은 비록 몇몇 동호인이었으나, 인천 연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토월회의 무대 장치가 원우전, 노련한 영화배우이자 연출자인 정암, 극작가 진우촌과 그 외 임창복, 임영균, 한형택, 김도인, 필자 등이 간부진이었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이 글은 1955년 옛 언론인 고일(高逸)이 그의 저서 『인천석금』에 정암과 그 주변에 대해 회상해 쓴 것이다. 시사의 주요 내용이 이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아 반세기 전 고일이 쓴 이 글이 아마도 정암에 대한 『인천시사』 인물편의 모태가 되었던 듯 싶다.
윤심덕이 토월회 회원이었던 것이 사실이고 극작가 김우진(金祐眞)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것이 1926년 8월이니까 정암이 그녀와 함께 공연한 것은 그 이전일 것이다. 또 <낭만좌>에서의 활약이나, <고려영화사>에서의 활동 기록도 단편적이지만 자료에 보인다.
다만 <칠면구락부> 창설이 1926년인 것으로 보아 고일의 말대로 “정암 씨가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울과 인천에서 동시에 연극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훗날 회상하며 쓴 글이기 때문에 시간 순서가 다소 바뀔 수 있을 것이지만 당시 함께 활동했던 동지에 대한 사실 기록이니만치 고일이 쓴 내용은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 고려영화사 쌍옥루
그러나 고일이 이와 같이 정암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평가와 행적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지만, 동아일보를 비롯한 그 당시 신문이나 잡지들이 진우촌, 원우전, 혹은 전호의 서일성(徐一星)에 관해서는 자주 그 이름을 거명하는 데 비해 어찌 된 일인지 정암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있다고 해야 고작 1925년 8월 고려영화제작소(高麗映畵製作所)를 박정현(朴晶鉉), 이귀영(李龜永), 이필우(李弼雨) 등 5명이 설립했다는 시대일보 기사와 1938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1회豪華연극콩쿨대회’ 극단 <낭만좌>의 출품작 「햄릿」의 출연자 명단에나 이름이 보이는 정도다. 영화나 연극 비평문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앞에 소개했듯이 정암은 부친 정재홍과 함께 부자 2대가 동시에 우리 『인천시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부친 정재홍 열사는 박영효를 저격하려다 자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광무 11년 5월 매천야록(梅泉野錄) 기려수필(騎驢隨筆) 정재홍조(鄭在洪條)에는 “이 날 12시에 경성 신사들이 장동(壯洞) 농상소(農商所)에서 박영효(朴泳孝) 귀국 환영회를 개최하였던 바 이 자리에서 인명의숙 경영자인 정재홍이 권총으로 자살하다. 그는 이날 환영회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나오면 사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분개하여 자살한 것이다.”라는 다른 내용의 기록도 보인다. 정암이든 정재홍 열사든 후학들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 「칼멘」 「사랑과 죽음」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작품인 「눈물의 빛」을 <가무기좌>에서 공연할 때, 주연 송수안 군이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고, 무대 뒤로 숨은 일이 있었다. 각 신문사가 후원한 만큼 입추에 여지없는 초만원 속에 첫 막을 열었었다. 진우촌이 배경 뒤에서 극본을 크게 읽어 주었건만, 송 군은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여보게, 변소가 어딘가? 나, 소변 좀 보고 옴세….
송 군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역을 맡아 본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시국 강연을 한바탕하였고, 노파 역으로 분장한 임창복 군을 나오라고 독촉해 전혀 다른 내용의 희극을 연출하고만 일까지 있었으니 그립기도 한 낭만적 시절이 아니던가 싶다.
정암 씨는 그 후 <포인극장(浦人劇場)>이란 연극 단체를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약 20년 전 성극 「스테판의 죽음」을 내리예배당에서 크리스마스 축하 연극으로 공연하였다. 헤롯왕에 황용문 군, 스테판에 임근수 군이 등장했으며, 그 뒤 경성방송국에서도 방송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도립병원에서 간호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성극 「해방」을 연출하는 등 아직도 연극에 대한 관심과 기여도가 크다.”
어두운 시절, 그래도 이 땅, 인천의 젊은 연극인들이 이렇게 향토 연극 발전을 위해 활동했던 일면이 하도 재미있고 또 한편 낭만적이면서 정암과 관련된 고일의 『인천석금』 기록을 조금 더 인용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