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니 2023. 4. 27. 00:15

박영성 화백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20 21:12:40

 

인천이 낳은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 박영성 화백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국전 대통령 수상자인 박영성(朴瑛星, 1926~1996) 화백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인천이 낳은 서양화가로서 후일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로 명성을 날렸는데 인천 미술사에는 그다지 변변한 기록이 남아 있지를 않다. 시사(市史)에도 겨우 이름 석 자 정도만 나와 있는 형편이다.

 

 1954<대한미협><자유미술동인>이 통합되면서, 인천에도 통합 <인천미술협회>가 발족할 당시 새로 영입된 회원으로는 박영성(朴瑛星), 황추(黃秋) 등이 있다.”는 구절이 인천시사에 나와 있는 기록의 전부다. 그리고는 제22회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것과 제23회 추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연표(年表) 식으로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사사로운 기록으로 고 우문국(禹文國) 화백이 1971월간 인천4월호에 실은 나와 인천예술인협회 시절이라는 글 속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501월은 인천미국공보원 개원 2주년 기념의 달이었다.

 

 당시 인천의 유일한 종합문화 기관인 미 공보원에서는 기념일에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내인(來仁)을 계기로 다채로운 행사 프로를 마련하였다. 그때 동원(同院) 미술과에 재직중이던 필자는 원장 안원생 씨에게 건의하여 미술 공모전을 개최하고 우수작에 대한 심사는 등급제로 하여 시상은 현금으로 주어 작가의 연구비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 요즘 국전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부상 제도인데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고 하겠으며 6·25로 인천 미국 공보원이 폐쇄되지 않았던들 이 공모전은 지금까지 존재하였을 것이고 상금도 풍부하였을 것이다. 이 공모전의 입상자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당시 미술대학 유학중인 박영성 씨 그리고 건축 설계를 하던 김충국 씨 등이다.”

 

 우문국 화백의 말대로 이것이 해방 후 인천 최초의 미술 공모전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처음 있는 미술 공모였다. 박영성은 미대 학생으로서 처음 이 대회에서 입상을 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박영성은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에 매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1974년 마침내 국전 대통령상을 거머쥐는 것이다.

 

 박영성 화백은 원래 충청남도 태안(泰安) 출생이다. 아주 어렸을 때에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살았고 학교는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란을 전후해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그러니까 박영성은 완전한 인천사람으로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인천창영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66년까지 동산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이후 서울에서 몇몇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0년부터 1993년까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내기도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생활 터전이나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겨 가면 그것으로 인천과는 단절인데 그는 만년까지 인천과 연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영성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별달리 뚜렷한 기록 한 가지를 인천에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의 성품이 고요하고 온유해서 그랬던 것일까.

 

 국민학교 교사로서 출발하여 중고등학교에 재직하고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앉은 교육 경력이 말해 주듯이 그의 사회적 처신은 교육자로 일관되어 왔다. 그 영역에 헌신해 오는 동안 그는 어쩌면 별다른 큰 야망 없이 평범한 봉급 생활자로서, 또는 소시민으로 생활을 영위해 온 보통 사람이다. 그의 미술가적 면모도 국전이라는 제도권 안에서 한 번 크게 부각된 외에는 특기할 만한 사실을 찾기 어렵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박영성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박영성의 생활 태도랄까, 성품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특기할 만한 것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별다른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천 미술사에 그의 국전 대통령상 수상 작품 제목 하나가 기록되지 않은 것도 그의 성격 때문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고 과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문국 선생의 말대로 한때는 문총 본부를 인천에 두어야겠다는 말까지 들은 인천의 문화계가 아니었던가. 물론 근자에 인천문화재단이 발족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우리 인천 문화예술인에 대한 조명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동안 지나칠 만큼 제 자신의 영역에조차도 관심이 없었고 소홀했었다는 생각이다. 박영성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의 빈약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박영성은 원색의 대비를 통해 향토적인 기물들을 소재로 한 정물을 많이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꽃이 있는 정물」 「해조등이 있다. 또 저서로 박영성 수채화선집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그림의 주제나 표현 기법을 깊이 들어가 새롭게 추구해야 할 때 유화를 그린다. 유화로 그 점들이 충분히 파악이 되었을 때 같은 주제, 혹은 비슷한 소재의 그림을 수채화로 그린다. 유화는 몇 번이고 고치고 덧칠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데 편리하고, 그것을 승화시킨 것이 내 수채화라고 말한 박영성은 특히 수채화에 있어 독보적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일러 인천이 낳은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 그가 바로 박영성 화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