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밤길>
소설 <밤길>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월미도는 월북 작가 이태준의 소설 <밤길>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이태준이 작품 활동을 했던 일제식민지 시절에 월미도는 꽤 유명한 관광지였다. 물론 조선 민중을 위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일제 관료들을 위해 월미도에는 오늘날의 해수탕이라 할 수 있는 조탕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들어섰다.
당시 경인선 철로가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인천과 서울은 쉽게 오갈 수 있는 지척이었다. 이태준도 무슨 이유에서였든 간에 인천에 자주 들렀을 것이고 수천 명의 하역 노동자들이 들끓고 있는 부두와 거대한 선박, 부두 주변에 조성된 공장지대, 공장굴뚝에서 솟구쳐 오르는 검은 연기, 가혹한 노동에 찌든 노동자들에 눈길을 뒀을 것이다. 서구 문물의 유입로이자 근대 조선의 관문이었던 인천에서의 경험은 일본에서 유학시절을 보냈던 이태준에게도 새로운 인상으로 각인됐을 터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이태준의 관심은 조선의 외면적인 성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인천의 부두와 월미도에서 식민지 근대화의 시련을 목격했고, 일본자본에 의해 근대적 산업체제가 형성되면서 발생한 조선 민중들의 궁핍하고 처절한 삶을 포착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민중의 비참한 삶을 문학적으로 구체화한다.
소설의 주인공 황서방은 날품팔이다. 서울에는 행랑살이나마 아내와 계집애 둘과 올해 본 첫 아들, 이렇게 딸린 식솔이 있다. 황서방이 인천에 내려온 것은 순전히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황서방은 집 짓는 공사장에서 날품팔이 일을 얻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지긋지긋한 장마를 만난다. 소설은 황서방이 비가 그칠 날만 기다리며 월미도를 바라보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월미도 끝에 물에다 지어놓은, 용궁각인가 수궁각인가는 오늘도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벌써 열나흘째 줄곧 그치지 않는 비다.'
소설에 등장하는 용궁각은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의 상류층의 유흥을 위해 바닷가 갯벌에 세워놓은 요정이다. 오늘날 용궁각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갯벌 위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 쌓은 돌 축대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랜 세월 짜디짠 갯물에 닳고 닳았지만 붉은 돌 빛은 여전하다.
용궁각 터는 월미도에 위치한 대성목재 정문 왼편에서 볼 수 있다. 누각이 소실되고 돌 축대 흔적만이 남은 곳에 조류에 밀려든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가 뒹굴고 있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의 상류층이 보기에는 바다 끝 물 위에다 지어놓은 용궁각은 꽤나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태준은 바다 위에 지어놓은 누각과 그곳에서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이는 일본인, 지배계급을 바라보는 조선 민중의 좌절감을 읽어낸다.
황서방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한밤에 돌이 지나지 않은 아들을 안고 포장도 되지 않았을 진흙탕 길을 밟으며 길을 나선다. 죽어가는 아기를 주안(朱安)에 있는 공동묘지 근처에 묻기 위해서다. 황서방이 아이를 안고 비 내리는 밤길을 뚫고 가는 장면은 숨이 멎도록 강렬하다. 이태준의 <밤길>은 단지 조선 민중의 비참한 삶만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황서방의 짧은 여정 속에서 인간의 절망과 비극을 축약하며 삶의 비정함을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를 들이대듯 불쑥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문학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꼈던 비정함을 훨씬 상회하는 삶의 비정함과 비극, 분노와 좌절을 경험했던 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헐떡이는 아기를 물구덩이에 생매장하는 장면은 삶의 비정함과 비극, 분노, 좌절이 뇌관처럼 응축돼 있다.
'이거, 왜 얼른 뒈지지 않어?/…/황서방도 분명히 꼴깍 소리를 들었다./아이는 아직 목숨이 붙었다./빗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간 것을 게운 것이다./제에길, 파리새끼만두 못한 게 찔기긴!/…/으흐흐 이리구 삶 뭘 허는 게여? 목석만두 못한 애비지 뭐여? 저것 원술 누가 갚어… /황서방은 그만 길 가운데 철벅 주저앉아 버린다. 하늘은 그저 먹장이요, 빗소리 속에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뿐이다.'
소설 속에서 황서방이 장맛비를 뚫고 나선 '밤길'은 오늘날의 배다리 우각로를 거쳐 독쟁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소설 속 공동묘지는 주안 신기촌 일대일 수도 있고 도호부청사가 있는 문학동 쪽일 수도 있다. 당시엔 그 일대가 모두 공동묘지였으니까. 소설 <밤길>에서 자신의 아기를 생매장하는 비정함과 비극을 지금의 신기촌과 문학동 일대에선 느낄 순 없다. 다만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그림자에서 저마다 묻어있는 인생의 비극을 짐작해볼 뿐이다.
/글·사진=조혁신기자 blog.itimes.co.kr/mrpen
소설 <밤길> 줄거리
이태준의 <밤길>은 1940년 <문장>지에 발표된 짧은 단편이다. 소설의 주인공 황서방은 서울의 행랑집에 아내와 두 딸, 갓낳은 아들을 남겨두고 인천으로 내려와 월미도 근처 집짓는 공사장에서 품팔이 일을 한다. 그런데 황서방은 계속되는 장맛비로 일을 못하게 되고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지게 된다.
서울 주인집에서 주인이 찾아와 황서방의 아내가 아이들을 남겨두고 도망가 자신이 고생을 했다며 황서방의 귀쌈을 올려붙인다. 주인은 정거장에 아이들을 팽개치고 가고 황서방은 두 딸과 젖을 못먹어 병이 든 아들을 데리고 공사장으로 온다.
갓난 아들은 죽어가고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하는 처지인 황서방에게 동료 권서방은 새로 지은 집에서 주인이 오기도 전에 아이가 죽는다면 공사장에서 당장 쫓겨날 것이라며 어차피 죽을 아이니 가서 묻어버리자고 한다. 황서방은 아이 문제로 권서방과 다투나 권서방의 생각에 동조하며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비 내리는 밤길을 나선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걷는 장면과 돌밭을 파고 빗물이 차오르는 구덩이에 아이를 묻으나 아이의 목숨이 채 끊어지지 않고 토악질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휘문고보와 일본 상지대학 예과를 다녔다. 구인회,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고, 1946년 월북 후 10년간 활동하다가 숙청돼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는 비운을 겪다가 생을 마감했다.
/조혁신기자 (블로그)mr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