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서구열강의 각축장 … 자취를 더듬다 (월미도)

형과니 2023. 5. 1. 10:19

서구열강의 각축장 자취를 더듬다 (월미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03 11:08:06

 

서구열강의 각축장 자취를 더듬다

 

금으로부터 103년전. 월미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후미진 바닷길 위에서는 142라는 숫자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비겁한 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포성이 쇠락해 가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까지 뜨믄뜨문 퍼져나가고 있었다. 일본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의 '런던타임스'는 팔미도의 러·일 첫 교전에 대해 러시아의 "카레이츠함이 일본함대를 선제공격하여 어뢰정에 발포했다"며 일본의 손을 들어준 반면, 독일의 '마리네 룬두샤우' 신문은 "카레이츠함이 일본함대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도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구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민족의 최대비극인 6·25전쟁이후 외세에 의해 그어진 38선의 역사는 조선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에 따르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러시아를 방문한 일본의 야마가다 원수는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사절로 참석해 외상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에게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해 러·일 영향권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군사, 외교적으로 일본을 압박하고 있던 러시아는 이러한 일본의 제안을 일단은 거부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20038월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새로 취역하는 대잠수함 초계함을 '카레이츠'라 명명했다. '고려인'또는 '한국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이름은, 19042, 러일전쟁 개전 초기 인천 인근 팔미도 해상에서 142의 열세를 무릅쓰고 일본 해군함정들과 격전을 벌이다 자폭한 구 러시아 함정의 이름을 승계한 것이다.

 

태평양함대의 대잠 초계함에 '카레이츠'라는 이름을 승계하도록 우정을 보였던 한국 해군의 노력과 함께 러시아 해군은 이 이름이 "당시 연해주에 진출해 있던 조선 사람들의 근면함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개항장(開港場) 제물포항(인천항의 과거이름)에 비롯된 인천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 서구열강의 치열한 각축장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인천시 중구 북성동을 주소로 하고 있는 월미도(月尾島)의 지명은 그 생김새가 마치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때는 서구열강사람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들 마음대로 월미섬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여 188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의 대장 이름을 따서 만든 외국지도에는 로즈섬(Rose island)으로 소개되어 있다.

 

1895년에는 영국 순양함 한척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군인 448명이 익사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에는 6.25의 한국 해병대 그리고 맥아더장군이 함께 기억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월미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빗살무늬토기와 갈돌, 석촉, 토제 어망추 등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어 청동기시대, 고려, 조선시대 유물과 함께 한국전 당시 총탄등도 심심치 않게 발굴되고 있다고 학계는 보고하고 있다.

 

월미도 해안의 위락지역과 함께 세계적인 낙조를 보여주고 있는 월미공원은 군인들의 역사와 함께 한다.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되어버린 섬 육계도(陸繫島). 제정 러시아의 저탄소가 있었으며 미국 스탠더드 정유사의 저유소. 일제강점기 때 돌 축대가 놓여져 육지와 연결되었고, 그 이후 60년대에는 해안도로가 놓아지고 있으며 일본군들이 석탄을 보관하기위해 편법임대로 사용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이용되었으며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최대 격전지였고, 이후 오랫동안은 국제연합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다음은 국방부로 넘어가 해군 제 2함대 사령부와 빨간색으로 치장한 위풍당당한 해병대 정문이 지금은 변신한 월미공원 정문 자리에 있어서 특유의 절도 있는 해병부대원들을 볼 수 있었던 곳이다.

 

문화사료적으로는 효종4(1653)에 임해사터에 행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곳이 현 월미공원 지역인지는 아직도 학계와 사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월미공원은 과거 50년간 군부대가 주둔하다 지난 200110월 시민의 품으로 개방되었다. 6·25전쟁때 함포사격으로 초토화 되었던 지역이 군사통제구역으로 50여년간 묶였던 탓에 259종에 이르는 각종식물과 동물들이 자생 할 정도로 생태계가 온전하다.

 

월미공원은 2008년쯤 정비가 끝나는데 인천시는 2004년부터 178억여원을 들여 월미공원 492면적에 궁궐, 양반, 민가 등을 갖춘 한국전통정원지구 기반 조성공사를 끝냈다.

 

/·사진=정암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