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집·미미집·월남집…신포동 신사 '외길 사랑'
서울집·미미집·월남집…신포동 신사 '외길 사랑'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01 00:48:52
서울집·미미집·월남집…신포동 신사 '외길 사랑'
주막에서 2
미미집 과 서울집 이 있던 신포동 옛터.
어느 한날 저녁, 백항아리는 여느 때와 같이 붐빔도 없이 올 사람들이 와 시장기어린 배를 축이고 있었다. 구석자리 문조 우문국선생과 본인도 약주 서너잔에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벽에 송판데기를 버팀목으로 만든 탁자는 그리 넓지 않은 관계로 가끔씩 숟가락 아니면 젓가락을 떨구기 일쑤 였는데 그날 따라 젓가락 다음으로 숟가락이 떨어졌었다. 젓가락을 주워 주인 할머니를 주고 새것으로 바꿀때까지 문조선생은 아무 말 없으셨으나 숟가락이 떨어질 때는 그 특유한 말 품새로 "숭산, 아냐냐 아냐" 하시며 손수 주워 새것으로 바꾸어 사용 못하게 했다. 허벅지 춤에 쓱 문질러 손에 쥐어준 문조 선생의 일장 강의, 지금껏 입에 달고 있는 나는 참으로 큰 것을 배웠다는 고마움으로 잊어 본 적이 없다.
그곳에는 예술계 웃전들이 많이 오는 관계로 말석에서 뒤돌아 잔 기울이는 본인은 하고자하는 말씀들이 없지 않아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 날 역시. 이야긴 즉, 왕들의 조상 명칭은 죽은 날을 기점으로 10간에 따라 붙였는데 문갑(文甲), 조갑(祖甲), 제갑(帝甲) 같은 관형어가 붙어 다녔고 왕후에게는 '비'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하며 갑골문에서 조(祖)자는 저(且)가 원형이며 '비'자도 비(匕)를 원형으로 하는데 저(且)는 남성 생식기를 의미하고 비(匕)는 숟가락을 뜻하는 시(匙)와 같은 뜻으로 숟가락처럼 생긴 여성기를 의미하니 떨어진 젓가락은 바꾸어 사용해도 좋으나 숟가락 만큼은 새로 닦아서 써야한다는 지론이다. 왜냐면 여자를 바꾸면 못쓴다는 의미에서.
옛무덤에서 출토된 숟가락을 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길죽한 타원형에 자루가 곡선으로 배부른 듯 휘어져 있다. 어떻게 국과 밥을 떠먹을까 싶은데 꼭 그것이 여성기의 모방임을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배우고 익히는 주막의 하루는 저물고 집으로 향하는 군상(群像)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시주(詩酒)에 젖고 화주(畵酒)에 젖어 내일을 기약하는 예술인들의 주막은 구획정리라도 한 것처럼 한 지역에 서도 잘 나뉘어 있다. 서예가 소강선생은 한 담벼락을 사이에 두었건만 '서울집'만을 고집하며 즐겼고 문인들은 '미미집'만을 애호하며 옆집 가기를 꺼려했던 것을 보면 단골이라는 것이 무섭고 외상이라는 것이 통하는 곳만 통하는 율이라면 규율이다. 어쩜 예인(藝人)들만이 가지는 아집과 고집, 신포동 신사들 아닌가. 때로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몇 사람, 여기서 한잔 저기서 한잔 술 값 한번 내보지 않고 졸업한 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저승가서도 그 '뽄새' 못 고칠 거라는 흉이 만발, 그 때는 정말 미운사람이고 말고 없었다. '재수없다' 다.
일진이 좋은 날 구세주 물주가 아니라 주주(酒主)는 따로 있었다. 조선대학에 있었던 김인환 미술 평론가가 인천엘 왔다하면 초저녁 약주, 소주에 알딸딸한 뱃속이 놀랄 맥주, 양주가 한달만에 인사를 하니. 아예 그날은 12시를 넘기고 다음날 귀가하니 어느 집사람인들 좋아할 리 없건만. 왜 '월남집'만을 또 고집했는지 알 수 없는 일, 석양의 건맨처럼 당당히 앉아있는 김 교수의 모습은 어딜가고 실수 연발, 주사파에 둘도 없는 중국 무술배우, 그러나 영원한 호프였건만 손설향 시인이 저 세상으로 간 후 인천에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저녁나절 방향도 잊은 채 걷는 신포동은 아나로그와 디지털 시대가 섞여 만든 곳으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좀 늦게 도착해도 반기는 술잔이 있고 선후배의 아픔이 있다면 서로 쓸어주는 인간의 냄새가 살아있는 주막 풍경은 인천 예술을 도시속에서 도시의 인간에 의해, 도시의 미학을 만들어 갔다.
그 사람들 이름은 잊었지만 떠오르는 얼굴, 얼굴들 신포동 주막에 있네.
/김학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