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
김학균 시인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8-07-06 14:05:01
"교육 발상지 '배다리 문화' 보존해야"
인천문협 60년사 발간 역사의식 세우기 앞장
인천문화재단 지원 받아 4년만에 시집 펴낼 예정
"쓰레기통에 오셨네, 우린 치는(치우는) 것 싫어해."
겨울바람이 쌩쌩 불던 지난 15일 오후 '김학균 문화예술연구소'를 찾은 기자에게 김학균(64) 선생이 말했다. 동양화와 고서적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림으로 반 쯤 가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조차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사무실은 냉랭했다.
양은주전자를 올려놓은 연탄난로 앞에 앉으면서 "작품이 많네요"라고 말하는 기자에게 김 선생은 "혼자 지랄하는 거지, 뭐"라고 받아친 뒤 청산유수로 달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최근 인천문협에 60년사를 펴냈습니다. 지역문단에서 이런 책을 펴내기가 쉽지 않은데 선생님께서는 인천문협 회장을 역임하셨고 책 집필에도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선은 인천에서 그러한 자기장르의 역사책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이런 책 발간을 문협이 감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고 또하나 부르짖고 싶은 것은 예총이건 민예총이건 60년이 다 넘거든요. 그런데 10년 전 예총50년사를 만들었는데 그 이후는 어디도 미동이 없다는 게 아쉬워요. 문학과 예술에서 후손사람들에게 증표가 되는 것을 만들어야 된다 그거예요. 자기 장르에서만큼은 역사의식이 투철해서 하나의 입립을 시켜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욕을 먹어도 좋지만 우리 선배들께서 하신 일에 대해 흠집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은 옳다 그르다고 할 때는 저는 좀 비판을 가하고 싶은게 있어요. 너무 내 것이 최고다라고 하셔서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래서 60년사를 꾸미면서 사실 밝힐 것은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있어요. 사실, 앞으로 증보판을 통해서 개정할 필요가 있지요. 어쨌든 인천문협60년사는 지금까지 방식과는 다르기때문에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인이시자 한국화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장르를 더 좋아하시고 요즘 작업실에 나오시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말씀해주시죠.
▲제가 요즘에는 굉장히 보릿고개예요. 시간 강사도 막히고 예산도 풀어지지 않았고 해서 12월부터 2월까지는 보릿고개예요. 저는 집에 가서는 아무 것도 못해요. 집에서는 으레 좀 퍼져서 다 잊어버리고 있겠다는 주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작업실에서 합니다. 글도 이 곳(작업실)에서 써서 집에 가서 컴퓨터에 옮기는 아날로그 방식을 택하고 있거든요. 오전 10시에 나와 오후 6시30분쯤 퇴근하는게 습관이 됐거든요. 머리가 혼잡하다 싶으면 화선지에 분풀이도 해가면서(지내지요).
그림 속에는 분명히 시가 있고 시 속에는 분명히 그림이 있어요. 그게 한대 왕유와 소식이 얘기했던 건데 그림 속에는 소리 없는 시가 있고 시 속에는 소리가 있는 시가 있다고 했어요.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들위로 흐른다, 이런 시의 묘사가 바로 그림이 들어있는 시고 또 그림을 그리면 시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맞아들어가기 때문에 저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돌아가신 소암 선생 등으로부터 사사를 받아 그림에 자연동기적으로 입문하게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그림을 그린 것은) 한 30년 되네요.
-초대작가이시죠.
▲네. 미술협회쪽이 아니고 서예협회 쪽예요. 근데 왜 그리고 갔냐면 서예에는 서예와 문인화와 서각과 전각이 포함되거든요. 제가 그리는 것은 동양화를 거친 문인화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요즘에 시는 안 쓰세요.
▲요즘 시는 학산문학, 작가회의, 문학과 창작 등에 쓰고 있어요. 저는 또 다원적으로 배다리문화권과 담론을 나누고 있으니까, 시는 자연스러운 시간에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 애를 배지도 않았는데 낳을 수 없는 것처럼, 시가 시처럼 우러나오는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4년만에 시집을 좀 내야되겠다, 하던 차에 인천문화재단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하니까 4월쯤에 발간할 예정으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지원금 받으려면 무기명으로 작품 20편 이상을 내야 하지요.
-시나 그림이나 선생님께서 타고난 재능이 두 가지가 있으신 거잖아요. '시중화 화중시'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평생 예술가로 살아오시면서 좀 전에 보릿고개라고 말씀하셨는데,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다시 태어나신다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것 같아요.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면 좀 더 밝고 길고 넓고 환한 길이겠지요, 그걸 염원하는데 지금 후회는 없습니다. 그림과 시는 사람을 정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나 하는 것이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또 선천적인 사람도 있다고는 하나 저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처절하게 비근해보면 안되고 또 가난한 자들이 왜 훌륭한 그림이나 글을 남겼느냐 하면 가난한 시절의 인고가 오늘 빛을 본다고 한다면 끝간데까지 가서 창출해낸 것이기 때문에 그거보다 값진 예술이 나는 없다고 봐요. 그만큼 생전에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경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난 이렇게 봐요.
-그럼 지금까지 예술쪽으로만 여쭤봤는데 인천에 여러가지 문화현안이 많거든요. 이를테면 (여기서부터) 조금 건너서 배다리가 있고 각국공원 창조적 복원사업이 있고 그 외에 또 현안이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화현안은 무엇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고,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대안이 있다면 어떤 대안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여기 동구에서 살고 있고, 인천에서 중동구를 거의 떠나지 않고 살았는데 배다리산업도로 문제 때문에 지역공동체가 흔들리면서 지역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배다리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인천에서 원인천지역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교육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영화, 창영초등학교가 백년이 넘었고 영화학당은 우리 나라에서 배제학당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거든요. 바로 여기가 교육의 발상지고 종교의 기상을 가진 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 산업도로가 가로질러간다 하면 글자 그대로 문화가 날라가는 일이거든요. 자기 땅에서 자기가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인데, 이 터전에서 뭘 큰 돈 벌겠다는 도시계획이 서 있는것도 아닌데, 왜 그런 지역의 공동체라는 분들이 왜 움직이는지 알아야 해요. 지역성은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아 인사동이 언제부터 인사동이었냐구요.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거고, 배다리라는 곳은 자연발생적으로 터전을 이루었단 말예요. 그것을 보존해가면서 인천적인 것을 가꿔나가는 각고의 노력은 고사하고 그것을 말살하려 한다면 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저 고향에서 살겠다는 것과 역사적 문화를 보존하겠다든가 하는 그것을 저는 숭고하게 받아들이고 동참을 확연히 못해준게 미안하다 생각합니다.
지금도 헌책방 거리에서 매월 마지막주면 시낭송회가 열리고 있어요. 그것은 책방거리사람들의 의식이 살아있다는거예요. 이건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소름끼치도록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헌책 팔아서 시인들 초청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얘기는 저는 대단한 문화일굼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10년, 20년이 가면 인천의 문화상품이 되는거고 배다리는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게 종건(인천시 종합건설본부)에서 9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힘들어 하는것 같은데요.
▲글쎄, 동구가 수탈의 역사를 갖고 있던 곳이거든요. 이제는 동구도 문화의 혜택을 입어야 되는거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도 녹지공원화 하면 되지요. 또 회관을 짓거나 다른 시설을 해도 용도적인 문제는 머리 맞대고 논의하면 좋은 대안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또 자유공원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차라리 데이터베이스 구축하는데 쓰는게 나아요.
남대문이 불 났는데 인천시도 정신차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디를 복원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짝퉁 만들어내는거거든, 까짜(가짜) 만들어내는 거거든. 천천히 조사가 된 다음에 먼 훗날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을 왜 그렇게 급조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김학균 선생은 한 마디를 물어보면 열 마디를 토해냈다. 저렇듯 할 말이 많은 것은 세상을, 또 사람들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모습은 초로의 작가를 '열혈청년'처럼 느끼게 했다. 전화를 받을 때도 "나 학균이야…"라고 말하는 그는 청년이 분명하다.
/글=김진국·사진=양진수기자 blog.itimes.co.kr/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