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근대 문물이 처음 들어온 도시로 유명하다. 국내 최초의 양복점도 1884년 지금의 중구에서 문을 연 '스에나가(末永)'이다. 단발령과 함께 양복을 입어도 좋다는 복장 규정이 반포된 1895년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옷감도 여느 도시와는 달리 흔했다. 한인이 경영하는 주단포목상(綢緞布木商)에는 주봉기상점, 개풍상회, 삼형상회 등이 있었고, 일인 상대의 옷감가게로는 '마스야(松屋)'와 '마에다(前田)' 상점이 성업중이었다고 한다.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직물류였으니 그럴 법도 했겠다고 여겨진다.
초기에는 영국제와 중국제가 태반이었다가 1905년 이후 러ㆍ청과의 전쟁에서 이긴 일본 것이 압도적이었다.
종류는 당목(唐木), 옥양목, 광목 등이나 최대 수입품은 역시 광목이었다. 그 한참 뒤인 1938년, 직물계의 혁명아 '나일론(nylon)'이 미국에서 생산되었고, 그 이듬해에 '나일론스타킹'이 발매돼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듀폰 사의 합성섬유를 일본인들은 '나이롱'이라고 발음했는데, 그것을 받아 우리도 '나이롱'이라 불렀다. '나이롱'은 섬유 이상의 대유적(代喩的) 의미로 사용됐다. 최신의 것, 질긴 것, 좋은 것은 대개'나이롱'이라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겉만 번지르르한' 의미로 추락해 '나이롱환자'까지 나왔다.
사전에는 "아프지도 아니한 데 아픈 척하는 환자를 익살스럽게 이르는 말"이라 했지만, '익살'은커녕 추악하기만 하다.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보험금)를 먹겠다고 덤비는 꼴들이라니, 망조든 사회가 따로 없다 싶은 살풍경(殺風景)들이었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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