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제물포해관 문서철-문헌 속 개항기 인천

형과니 2023. 5. 11. 09:44

제물포해관 문서철-문헌 속 개항기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25 19:38:53

 

문헌 속 개항기 인천-1

(1) 제물포해관 문서철

 

인천신문은 화도진도서관 향토·개항문화자료관과 함께 옛 문헌 및 자료들을 소개하는 문헌 속 개항기 인천을 신설, 인천의 문화·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인천을 바로아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지난 2000년 향토개항문화자료관을 개설, 문광부로 부터 특화도서관으로 지정받은 화도진도서관은 개항기인 18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각종 지역 관련 문헌자료 8천여점와 근현대 사진자료를 수집, 보존하며 향토애를 살려나가고 있다. 본란은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중요하면서 흥미로운 문헌들을 선정, 요약해 격주로 연재한다.

 

‘1885 Despatches from Chemulpo’(‘1885년 제물포해관 문서철’)

 

이 문서는 개항기 인천해관의 외국인 해관직원들이 총해관세무사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보고한 일상적인 해관업무와 묄렌도르프가 지시한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한 문서다. 지난해 서울세관이 필사본을 번역해 영인본으로 내놓은 것으로 올초 화도진도서관에 전달됐다.

 

우리나라 세관 효시로는 개항 이후 1878년 조선정부에서 설치한 부산 두모진으로 꼽고 있으나 일본의 무력시위에 3개월 정도 밖에 운영되지 못했다. 다시 세관이 재건된 것은 1883년 인천해관을 비롯한 원산, 부산해관이다. 개항순으로 따지면 부산이 가장 먼저이지만 근대 세관설치는 인천이 가장 앞선다.

 

해관은 조선의 정부기관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운영의 주체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신분의 국가공무원이었던 세관원들은 상당수가 이미 청나라 세관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청나라 세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묄렌도르프는 조선정부와 계약을 맺고 외무협판직과 세관설치 및 운영전반에 전적인 책임을 맡았다. 그가 조선 세관원으로 고용했던 사람들은 청국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었거나 청국이 추천한 사람들이었으며 일부 조선정부에서 추천한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인 세관원 임명기록도 나타난다. 정식 영어를 배우지 못해 세관을 운영할 수 조차 없었던 현실을 직시하여 정부는 관립영어학교(동문학)를 설치하고 교과과정을 졸업한 자로서 성적이 뛰어난 자 중 세관사무를 배울 인재로 추천하였는데 묄렌도르프가 세관원으로 채용한 문서가 하나 남아있다.

 

또 관세수납 문제로 인천 일본영사와 빚은 갈등도 자세히 적혀 있으며, 묄렌도르프 명으로 정부 배를 빌려 불개항지 (법성포, 목포 등)를 항해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약 60페이지의 문서와 해도들 외에도 3(인천, 원산, 부산)의 당시 기상을 기록한 표가 남아 있다.

 

1885년 인천해관 화재시 발화시간과 일자, 진행상황과 피해내역 등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향후 조치 및 책임여부에 대한 기록, 관련자의 변명서와 확인서, 파면기록도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의 국교 수립 후 보빙사를 파견하였을 때, 우리 사절단이 요청한 미국 소(cow 2마리, bull 1마리 - 종자 개량용 추정)가 최초로(1885410)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사실도 나타나 흥미롭다.

 

당시 조선정부가 이에대해 인천해관에 면세 지시를 내린 정황도 담겨 있다. 문서에는 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직을 물러난 18859월말 까지만 담고 있는데 묄렌도르프가 경질되고나서 정부로부터 임시총세무사로서 스트리플링이 지명받자 이에 대한 감회를 적은 서한도 매우 흥미롭다.

 

도움말 = 김성수(서울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