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차 한 잔 하고 싶은 사람, 유동현

형과니 2023. 5. 12. 00:42

차 한 잔 하고 싶은 사람, 유동현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8-08-13 00:28:40

 

차 한 잔 하고 싶은 사람, 유동현

<유봉희의 그 사람이야기 >

 

어느 날 일터의 내 방 책상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시꺼먼 표지에 골목길을 걷는 아이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는 좀 맨송맨송한 책이었다. 저자의 이름도 없었다. <골목길에 바투 서다, you>란 표제만 다가왔다. 두터워 보이기는 했지만 무슨 전시회의 리플릿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방치해 두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창밖으로 폭우가 퍼붓던 날 책상위의 그 책은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비와 그 책이 주는 이미지가 묘하게 포개졌던 것이다. 사진집이었다. 손 가는대로 펴보니 송림동 골목길의 풍경이 다가왔다. 그 옆에 이렇게 몇 자 적어놓고 있다.

 

 

담과 담 사이

담과 벽 사이

벽과 방 사이

방과 방 사이

방과 창 사이

창과 창 사이

············골목이 있습니다.

(송림동 2005. 4)

 

하나의 잠언이고 시로 들렸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사이(). 인간(人間), 공간(空間) 등 모두가 사이를 둔다. 사이란 단순한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사이는 무수한 대화와 만남과 담론들이 오가는 숨통 같은 통로의 역할을 해왔을 터이다. 그래서 골목이 그리워지고 추억 속 협궤열차처럼 마구 그리로 내달리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사진집 골목들의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 만석동·화수동·화평동·율목동·십정동·숭의동·용현동·학익동·송현동·중앙동·창영동·동춘동·논현동·산곡동·송현동·북성동·부평동까지. 이렇게 놓여있는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지랄같이 퍼붓던 비도 그쳐 있었다. 창밖을 보면서 담배를 물고 만석동 북성포구를 더듬었다. 포구의 지난 시간들을 불러보는 참이었다.

 

나를 찾아 인천에 오는 손님을 안내할 때면 버릇처럼 찾아가는 곳이 바로 북성포구였기 때문이다. 월미도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래포구보다는 북적대지는 않지만 우리네 때 묻은 삶과 호흡할 수 있는 그 구질구질함이 좋아서였다. 바람에 비닐들이 펄럭이는 포장마차에서 한 잔을 걸치자면 포구 너머의 공장 불빛들에 흔들리는 바닷물이 내겐 세느강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사진집의 풍경들은 모두가 추억과 고단한 삶의 흔적들, 지난 시간들의 모듬들이었다. 다들 사라져가는. 사진 찍은 이는 송현동 허름한 집 벽을 타고 올라가는 장미를 보고 이렇게 적어놓았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이것을 다시 나는 이렇게 돌려놓고 싶었다.

 

꽃 한 송이가 사라졌습니다.

아름다웠던 지구 한 모퉁이가 무너져버렸습니다.

 

개발을 외친다. 도심의 재생을 외친다. 재생(再生). 재탄생이겠다. 기독교에서는 침례(浸禮), 세례(洗禮)라고 한다. 히브리어 밥티스마에서 온 것이다. 밥티스마는 물에 잠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를 허무는 의식이 아니라 과거를 깊이 반성한 후 온전한 몸으로 다시 태어남이다.

 

도시재생 사업은 불도저나 포크레인으로 깔아뭉개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재생은 늘 과거를 호명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인하대 건축과에 재직하고 있는 어느 교수는 주택단지를 조성할 때 달동네를 참조해야 한다고 내게 강조한 적이 있다. 달동네처럼 인간적이고 효율적인 공간을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비좁은 골목골목 사이로 이어져 마침내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 비건축가, 아마추어들의 자유로운 커뮤니티적 상상력,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비오는 날 내가 본 사진집은 이러저러한 물음을 던져주었다. 쓸쓸했지만 고마웠다.

 

한참을 사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사진 찍은 이가 궁금해졌다. 겉표지 날개에 유동현, 그리고 짤막한 이력이 있었다. 작가란 타이틀도 없었다. 책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지웠지만 그래도 독자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유동현이란 이름을 본 직후 나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동현 형이 이런 사진을, 이런 글을 이런 책을. 그것도 소리 소문도 없이 슬그머니.

 

유동현은 그런 사람이다. 늘 자신을 낮추고 앞세우지 않는다. 늘 뒤에 있는 듯하지만 지역 관련한 일들을 차근차근 해낸다. 그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굿모닝 인천> 편집장이다. 인천 동구 송현동 35번지, 공장 기찻길 옆 골목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의 정서와 과거를 담아내는 작업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모두가 작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들이다. <굿모닝 인천>, 그 작은 지면에서도 관의 홍보용 기관지 같은 것이면서도, 그 속에 인천의 정서를 담으려 무진 애를 써온 것은 독자라면 다 알 것이다.

 

나는 그런 유동현을 좋아했고, 형이라 불러왔다. 이 자리를 빌어 출판기념회에 못 간 것을 고백하고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괜찮아, 뭐 대단한 책이라고···”. 분명 그럴 것이다, 그 형은. 그래도 미안하다. 인천에 사는 후배로서 인천의 흔적들을 찾아 기록하는 그 정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하는 깁보섭 형과 시 쓰는 김윤식 선생과 등등의 사람들과 따뜻한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정말로.

 

* 필자 유봉희 님은 63년 충남 대전 출생으로 인천시민신문 등 신문 문화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지역문화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현재는 도서출판 다인아트 대표로 다양한 기획출판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인하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을 수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