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서울시 청사와 제고(濟高) 강당

형과니 2023. 5. 14. 00:20

서울시 청사와 제고(濟高) 강당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8-09-18 01:29:51


서울시 청사와 제고(濟高) 강당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서울시 청사 해체와 복원 문제로 서울시와 문화재 당국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시민단체도 서울시를 대상으로 법적 투쟁을 벌이겠다는 며칠 전 모 방송 보도를 보았다. 서울시청에 대한 안전 검사가 적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시 청사의 해체 문제는 당초 서울시가 문화재위원회의 보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관 건물의 해체에 돌입하자 문화재위원회가 사적(史蹟)으로 가지정함으로써 해체 공사가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 것으로 현재 두 기관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안전을 내세우면서 문화재위원회의 사적 지정 기준이 모호해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고,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가 기존의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축하려 한다’며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일반시민들도 서울시 청사는 ‘일제의 잔재라 철거가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측과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이니 보존하자’는 측으로 갈려져 있다. 이렇게 양측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경우 어느 한 쪽으로만 판단하거나 결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건물이 일제 시대에, 또는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것일 경우 민족감정까지 덧씌워져서 더욱 논란을 부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거된 옛 중앙청 건물이었는데, 서울시 청사 역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객관의 눈으로 냉정하게 우리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 부질없는 낡은 건물에 대해 실용의 안목과 민족의 감정을 우선해 보아야 하는가.


이 비슷한 사례가 최근 인천에도 있었다. 서울 시청만큼 세인의 이목을 끌 만한 건물은 아니지만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이 철거냐 보존이냐를 놓고 갈등 양상을 보였었다. 관심 있는 이 학교 동문들도 역시 양론으로 갈라져 논란을 거듭했다. 일부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여름 내내 설왕설래했다. 일제가 1935년 인천중학교를 개교하면서 지은 건물인 이 강당에 대해 보존을 주장하는 쪽은 ‘그 역사를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 옳으며, 거기에 광복 이후 우리의 교장(敎場)으로 쓰인 엄연한 사실’을 강조했고, 철거론 측은 ‘낡고 퇴락해 학생들의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썩 볼품없는 일제의 잔재에 불과할 뿐으로 당연히 철거해 새로운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결국 제고의 강당은 문화재위원회에 의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외양은 밋밋하나 내부 및 건축 양식의 독특함과 이 건물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건물을 안전하게 손보아 소규모 인천교육사박물관이나 학교 연혁관 등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에 있다.

이 같은 논란과 결정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건물들은 일단 철거가 되면 다시는 지상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철거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천재지변이 아닌 다음에, 또 수많은 인명이 단번에 피해를 보게 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진정 건물의 철거는 신중과 세심한 고려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의 교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재라면 불 탄 숭례문이나 경복궁, 석굴암만을 생각하는 맹점도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문화재 교육이란 더더욱 요원한 이야기가 아닌가. 해서 문화재청이나 문화재위원회의 책무가 크다는 것도 이번 두 건물을 통해 느낀 교훈이라면 교훈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지나친 개발 논리에 물들어 있다. 옛것은 악(惡), 새것은 선(善)이라는 극단적인 심리를 곳곳에서 본다. 과거는 무조건 낡은 것이고 비실용적이며 불편하다는 관념. 그리고 개발이나 신축이 최선의 실용이라고 생각하는 ‘개발에 맹종하는 자기 최면(催眠)의 중증’을 도처에서 목도한다. 사유재산이기는 했지만 과거 인천에 있던 제법 잘 생긴 개항기의 건물이 지방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불과 며칠 사이에 급작스럽게 철거가 된 일이 있었다. 개발이 제한된다는, 그 불이익을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건물주의 생각 때문이었다. 철거는 이렇게 쉬웠고, 우리는 지상에서 다시는 그 건물을 볼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