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했던 운송인-심명구
근검했던 운송인-심명구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12-11 11:56:59
근검했던 운송인
지난 여름 선광의 심명구 회장 별세 후 인천의 또 한분 어른을 잃었다. 공성운수 창업자이신 심영섭 회장이시다. 같은 청송 심씨시며 동갑이라고 하시더니 가시는 길조차 같은해이시다. 한분 한분 부음을 접할 때마다 사랑을 받던 후배된 처지에 외로움과 허전함을 금할 수 없다.
평소에 건강 관리와 근검이 몸에 배신 분이었다. 1991년 가을이던가. 일단의 인천상공회의소 상공인들이 중국여행을 했을 때이다. 아침마다 일어나시면 간단한 맨손체조를 거르지 않으셨다. 선 채로 허리 굽혀펴시기를 젊은이보다 더 길게 하셨다. 관광지 계림의 복파산에는 일착으로 오르셨다. 산이라고는 하나 아름다운 이강변의 얕으막한 산-그러나 가팔라서 젊은이라도 몇번이고 쉬어 올라가야 하는데도 일착이셨다.
그분은 신문사에 오시기도 했으려니와 전화도 자주 주셨다. 신문 보도에 이의를 제기하시고 오자를 일일이 지적하셨다. 그리고 자유공원의 가로등이 깨졌는데 고발기사도 안쓰냐고 하셨다. 보도블럭이 흔들거리는데 행인이 잘못 딛어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신문이 잠자코 있느냐는 질책도 있으셨다. 거리를 지나시다가 휴지 조각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집어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그런 일까지 하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하면 “그럼 누가 하느냐”고 반문하셨다.
채 두달이 아니 되었다. 지난 9월 신포동 모 다방에서의 ‘인천언론사’ 발간 준비모임이 있었을 때이다. 잠시 후 일어나시면서 바빠서 먼저 가니 점심이라도 함께 나누라며 회중의 식사값을 챙기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1950년대에 모 통신사에 근무하셨던 전직 언론인이셨다. 그 자리에서였다. 전망차자에게 “이 사람 그동안 전화 한통화도 없었나. 무정한 사람 같으니라구” 하시는 핀잔일 때는 죄송스러워 아무 답도 못했었다. 친구의 백씨셔서 집안 어른처럼 어렵게 여기던 분이셨기에 더욱 몸둘 바를 몰랐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무엇이 그리 급하시다고 서둘러 가시는 것일까. 진작 그분들의 생전에 참고될 만한 지역의 숨은 일화라도 녹취하지 못했냐는 불찰을 뒤늦게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