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이름 구름다리(화평동-전동)
예쁜이름 구름다리(화평동-전동)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12-16 22:38:50
예쁜이름 구름다리
경인선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일 때였다. 인천전환국 옆으로 막힌 산을 파헤치는 작업 중 흙더미가 무너져 인부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하는 참사가 있었다. 독립신문 1899년 7월17일자 보도이다. 전환국 옆이라면 이전의 인천여고가 자리하던 자리요 산이 막혀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송월동으로 넘어가는 위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송월동 응봉산 줄기가 화도진으로 연결되는 이 지점을 ‘인천석금’에서 고일 선생은 발길이 뜸하여 강도·살인사건이 빈발했다고 적고 있다. 아무튼 이곳에 철로가 뚫려 허리가 끊어지게 되자 육교가 놓였다. 이를 ‘구름다리’라고 했다. 구름다리라 함은 도시의 두 건물사이나 깊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공중에 걸쳐놓는 다리를 이름이요 그곳을 예쁜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인들은 흑교(黑橋)-즉 검은다리라고 했다. 당시 흔치 않았을망정 겨우 자동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었을 만큼 좁았는데 검정칠을 한 나무난간의 다리여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다리가 놓인 이후 구름다리는 요긴한 길목이 되었다. 한인 동네인 화평·화수동 주민들은 이곳을 지나 홍여문으로 해서 도심으로 갈 수 있었다. 그 시절 그곳에서는 희한한 구경거리가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일인 축제행렬이 그곳을 지나갔다. 지금 인천여상고의 인천신사를 출발한 그들의 신여(神輿) ‘미꼬시’를 앞세운 “왓샤 둥둥”하는 소위 ‘왓쇼이’가 구름다리를 건너갔는데 인근 어른·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자살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었다. 시신을 오래도록 방치하느라 지나는 행인들이 눈길을 피해야 했다. 그곳은 철로를 경계로 전동 화평동, 그리고 인천경찰서와 동인천서의 관할구역 경계로서 서로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이었다. 교통량이 늘어남으로써 교폭이 확장된 것은 1967년 5월이었다. 그리고 경인철도의 복복선화로 다시 폭이 넓어졌다.
옛 인천여고와 구름다리간 도로에 야간주차를 허용한다는 1단짜리 기사가 눈길을 끈다. 제목은 ‘화평운교’이다. ‘구름다리’라고 해도 좋을 것을 한자이름으로 한 것은 옛 예쁜 우리 이름을 등한시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