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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70년대의 한국영화

형과니 2023. 5. 26. 00:33

[10] 1970년대의 한국영화

 

1970년대를 맞았다고 해서 금방 영화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술이라는 것은 정치 · 사회 변동에 따라 변화를 겪게 되지만 기나긴 창조과정이 있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는 없다. 그러나 1972년 군사정권의 극단적 형태인 소위 유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영화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부는 영화를 강력한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으로 영화법을 대폭 개정해서 발표한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Ⅰ. 기본방향

(1) 유신이념의 구현을 위해서 영화계의 부조리를 제거하고 영화기업을 적극 지원

(2) 우리 영화의 제작은 양보다 질에 치중하고 전통문화예술을 창조적으로 개발

(3) 외국영화는 우리의 유신이념의 구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를 정선 수입

(4) 우리 영화의 수출은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유신 한국의 해외 선양에 기여할 수 있는 영화를 정선 추천

 

. 우수영화 제작 및 수입방침

(1) 애국애족의 국민성 고무 진작

(2) 진취적 국민정신의 배양

(3) 새마을운동의 적극 참여

(4) 인간상록수 소재

(5) 농어민 계몽

(6) 성실 · 근면 · 검소한 생활자세의 인간상

(7) 조국 근대화의 산업전사 소재

(8) 국난 극복의 역사적 사실

(9) 국민의 총화단결

(10) 국민의 각성촉구

(11) 수출 증대, 과학화 촉진

(12) 모범 공무원의 부각

(13) 미풍양속, 국민정서 순화

(14) 건전한 국민오락의 개발 보급

(15) 문화재 애호정신 함양

(16) 민족예술에 기여할 고유문화의 전승 발전

(17) 순수 문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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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영화법 개정 취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소위 국민예술의 내용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놀랍다. 가령 일제가 내세운 국민연극의 방침을 보면 첫째, 일본연극의 전통미를 살림과 동시에 국민문화의 진전에 자()할 국민연극을 수립할 것, 둘째, 이것으로 인해 종래 비생산 분자의 점유물로 보여지던 연극을 국민 전체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침하에 연극의 기구조직의 재편성과 공장 · 광산 · 농산어촌의 생산면에 보내는 이동연극대의 확대 강화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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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국민연극의 정의(定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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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국가이념을 굳세게 무대에 표현할 것, 구체제와 신체제에 대한 변모를 명확히 할 것, 그리고 개인보다는 공익을 우선으로 할 것 등을 예시하고 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치가 했던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일본식으로 환치한 것으로 목적예술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정된 유신영화법에서 그런 냄새가 꽤 풍겼던 것이다. 즉 영화예술에 유신이념 구현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라든가 외국영화도 유신이념에 부합하는 것을 주로 수입하라고 한 것, 그리고 전통예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영화, 애국애족의 국민성 고취, 특히 긍정적 인간상 창조 같은 내용에서 그런 냄새가 강하게 배어 나온다. 정부가 이러한 목적영화를 창조하고 보호, 보급하기 위해서 검열제도를 강화시켰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유신이념의 강제적 영화 주입과 검열의 강화는 영화를 위축시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영화전통은 일제 때 기초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저항을 기조로 한 것이 특징이다.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만큼 한국영화는 사회성이 강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1973년 이후, 소위 유신시대에는 사회 고발성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가 없었고, 이러한 현상은 영화제작의 위축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70년도에 국산영화 제작편수가 231편이었던 것이 9년만인 1979년도에는 96편으로 감소되었고 영화관객수도 1969년도에 연인원 17천여만명이었던 것이 10년만인 1979년도에는 6,500만명으로서 1/3로 격감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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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에도 정부에서는 영화진흥회사를 설치하는 등 국산영화를 보호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술이란 것은 자유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정부 당국자들이 간파하지 못한데 문제가 있었다. 진흥정책을 아무리 쓴다고 하더라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억압적인 통제사회에서는 예술이 융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영화의 경향은 사회성 짙은 문제작보다는 사극(史劇)영화나 순수문예물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억압사회, 즉 예술표현의 제약이 심한 격동의 사회에서는 역사물이 범람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역사의 숲으로 은신하거나 과거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가령 1970년대의 대표적 역사물만 보더라도 최인현(崔寅炫)감독의태조 왕건을 필두로 해서 정진우감독의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규웅(李奎雄)감독의세조대왕성웅 이순신, 신상옥(申相玉)감독의궁녀, 이형표감독의논개같은 작품들이 제작 상영되었다. 이들 외에도춘향전이라든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몇 편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집권자의 선호와 국난극복 의지를 묘사코자 그런 목적성 짙은 역사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1970년대 역시 1960년대의 문예영화 흐름이 그대로 이어졌다. 대표적 문예영화를 꼽는다면 유현목(兪賢穆)감독의분례기(방영웅 원작 소설)불꽃(선우휘 원작 소설)을 위시하여, 김수용(金洙容)감독의토지(박경리 소설)황토(조정래 소설)화려한 외출(김용성 소설)웃음소리(최인훈 소설)망명의 늪(이병주 소설), 신상옥감독의13세 소년(선우휘 소설), 최하원감독의갈매기의 꿈(황순원 소설), 이만희감독의삼포가는 길(황석영 소설), 김기영감독의파계(고은 원작)이어도(이청준 소설) 등이 대체로 중진감독들이 만든 대표적 문예영화들이다.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것은 1970년대에는 신예감독 몇사람이 두각을 나타낸 점이라 하겠다. 가령 이장호(李長鎬), 임권택(林權澤), 김호선(金鎬善), 하길종(河吉鍾), 이두용, 고영남(高英男), 변장호(卞張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대표작을 몇 편 든다면 이장호의별들의 고향(최인호 소설)을 필두로 해서, 김호선의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소설), 하길종의바보들의 행진(최인호 소설), 임권택의왕십리(조해일 소설), 고영남의소나기(황순원 소설), 김기의돌의 초상(최인호 소설), 변장호의을화(김동리 소설)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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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70년대 문예영화의 특징은 1960년대와는 달리 산업사회의 병리를 여성을 등장시켜서 묘사한 점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최인호라든가 조선작, 조해일, 이청준, 황석영 등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예리한 젊은 소설가들의 인기작들을 영화화함으로써 젊은 층 대중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 감독은 신세대 여성들의 새로운 사랑패턴을 제시함으로써 젊은 관객의 호응도 샀다. 새로운 신인의 감각에 의한 젊은 세대의 사랑을 묘사한별들의 고향, 김호선감독의영자의 전성시대」「여자들만 사는 거리」「겨울 여자, 김응천감독의미스양의 모험, 박호태감독의나는 77번 아가씨, 정소영감독의내가 버린 남자등이 그런 유형의 작품들이다. 이들 중에서 김호선감독의겨울 여자는 영화사상 최고의 입장인원(개봉)585,775명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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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1970년대 영화계는 유신의 정치적 암흑시대였던 때로 영화가 정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질량면(質量面)에서 크게 위축되었고 영화계 내부 개편도 겪었다. 그런 속에서도 유능한 감독들이 여러 명 등장하여 암울한 시대 속의 인간상을 매우 우회적으로 표출하려 노력하였다. 특히 산업사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되는 서민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묘사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신파극에서 자주 묘사된 기생의 삶이 1970년대 영화에 와서는 호스테스의 좌절로 묘사된 것이 흥미롭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정치가 예술을 억압해도 예술은 발전한다는 교훈을 보여준 것이 1970년대 영화였다는 점이라 하겠다. [서울시육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