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문화재

강화동종(江華銅鍾)

형과니 2023. 6. 7. 00:13

강화동종(江華銅鍾)

인천의문화/인천의문화재

 

종 목  보물  제11-8호 


명 칭 강화동종(江華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0 강화역사관내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인천광역시
관 리 자 강화군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종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37년(1711) 강화유수(江華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주조(鑄造)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 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乳廓)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옆띠를 돌려 구연대(口緣帶)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鑄鐘) 관계와 개주(改鑄)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종각(鐘閣)은 260여년전에 강화성(江華城)의 남문(南門) 동쪽에 건립하였던 것을 강화국방유적(江華國防遺蹟) 복원정화사업(復元淨化事業)과 함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존(保存)하고 있다.

 

총중량이 3,912kg에 높이가 198cm이고 구경(口徑)이 138cm에 달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巨鐘)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