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반문화사랑회

개항과 담배

형과니 2023. 6. 7. 00:39

개항과 담배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10-01-31 14:29:31

 

개항과 담배

강 덕 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조선 사회에 담배가 전래된 이래 연초의 수요는 계속 증가해 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일용품처럼 사용되어 미곡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되고 귀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반 민들은 주로 엽연초를 잎 그대로, 관리·양반·상인·지방의 토호·부호 등 상류계층은 각연초(엽연초를 잘게 썰어 가공한 것, 살담배)를 담뱃대(곰방대, 長竹)에 담아 피웠다.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은 사대부층의 사치풍조를 쇄신하기 위하여 장죽(긴 것은 1m)의 길이를 반으로 줄이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외국 담배가 유입·소개되었고, 1883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원의 소비지역 관문이었던 인천이 개항한 후에는 서양 및 일본의 담배 수입이 증가해갔으나, 그들이 수입한 담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의 양반관리나 상인층 및 부호층 등 상류계층을 대상으로 유포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소비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은 군대 및 인부의 이동에 따라 외래 담배가 널리 내지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고, 또 당시 김홍집 정권은 길거리에서 한국인이 종래 사용해 오던 긴 담뱃대(長煙管)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입한 담배의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1895년에 실시된 단발령이 결과적으로 양복을 착용하게 함에 따라 긴 담뱃대의 휴대보다는 서양식 담배가 편리하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인의 관습 중에서 어린 사람이 연장자 앞에서 끽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담뱃대를 휴대하기도 어려운 사정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0년경 담배는 이미 내륙지방의 소읍에서도 주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당시에 수입된 담배는 일본제가 다수를 차지하였는데 목촌합명회사(木村合名會社촌정형제상회(村井兄弟商會) 등의 인천지점이 생겨났고, 특히 촌정형제상회 인천 대리점에서 판매하는 히로(HERO)는 담배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한국에 수입된 담배는 황성신문·독립신문·제국신문 등의 광고를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담배의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때와 거의 동시에 외국의 자본은 자국의 담배를 수입·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에 연초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제조·판매코자 하였다. 1896년 경성에 담배제조업에 전념하는 일본인이 나타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주로 인천·부산 등의 거류지를 중심으로 대자본을 투자하여 제조공장을 설립하고 담배를 제조·판매하면서 시장을 확보해 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양연초회사와 인천연초회사이다. 동양연초회사는 그리스인 밴들러스 필립이 영국인과 합자하여 19025월 인천에 자본금 3만원을 투자하여 빈정(濱町:사동)에 설립한 것으로 담배를 제조·판매하였다. 19035월에는 자본관계로 조업이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영업은 계속하였다.

 

인천연초회사는 동양연초회사의 지배인이었던 영국인 해밀턴이 동양연초회사를 떠나 190311월 인천에 자본금 5만원을 투자하여 청국거류지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후에 일본인과 합자하여 인천연초·권련초회사(仁川煙草及卷煙草會社)로 개칭하여 영업하였다.

 

일본인은 담배제조의 절대적 우세하에 한국인의 제조업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상해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의 담배가 한국에서 판매되고 1906·07년에는 한국의 주요도시에 판매점을 설치하면서 일본 담배와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급기야 1908년 영미연초회사 인천 공장을 설립하여 제조판매에 돌입하자, 1909년 일본정부는 동아연초회사에게 특허권을 주어 경성에 대규모 연초공장을 설립하여 영미연초회사에 대항하였다.

 

1910년대 담배의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고 그 업에 종사하는 직공수는 제조공장 가운데 가장 많았다. 연초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사회적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단체를 결성했고, 이들의 노동쟁의는 특히 일본인 제조공장에서 두드러졌으며 다른 분야의 노동운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항거의 표시가 3·1운동에 참여하는 간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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