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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추억 담은 필름은 여전히 돌아간다

형과니 2023. 6. 11. 00:58

경동-추억 담은 필름은 여전히 돌아간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0-04-03 22:35:21

 

추억 담은 필름은 여전히 돌아간다

 

경동(京洞)경성(서울)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경동이란 행정명보다 흔히 싸리재라고 불렀다. 뜻풀이를 하면 싸리가 많은 언덕이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싸리가 많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향토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은 한때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인천 최대의 번화가였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 헐리웃 키드의 낭만, 애관

 

시계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제물포항에 짐을 내린 벽안(碧眼)의 외국인은 서둘러 서울로 향한다. 말잡이는 싸리재로 길을 잡는다. 우마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 초입에 들어서니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이 경작하는 양배추 밭이다. 오른쪽 언덕에는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고개길을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 개통한 경인철도이다.

 

시계바늘을 50여 년 전으로 당겨본다. 이제 전쟁은 끝나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삶의 씨앗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싸리재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던 경동에 양복점과 양화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길 양 옆으로는 상점들이 빼곡히 줄을 이었다. 긴담 모퉁이 길 입구 언덕에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지은 기독병원이 개원하고 주변에 개인병원도 한 집 걸러 하나씩 생겼다. 더불어 약방과 약국도 속속 문을 열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20102월 중순, 겨울비가 내리던 날 그곳에서 다시 시간여행을 한다. 경동파출소 앞에 섰다. 6·70년대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있던 시절에 번화가의 특급지 답게 사건사고로 늘 시끌벅적했던 파출소였지만 지금은 경동치안센터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의경 혼자 한가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동에 오면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어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애관극장이다. 이 극장은 공인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협률사(協律社)라는 우리나라 최초 공연장의 뿌리를 품고 있다. 애관극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경동거리는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한동안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인사를 하던 날 이 일대가 교통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전설로 남아있다.

 

애관은 지난 2004살아남기 위해’ 5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로 변모했다.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고 있는 아바타와 공자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장에 들어섰다. 평일 한낮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 안의 풍경은 늘어진 필름처럼 한가롭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두 시간 내내 까치발을 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던 헐리웃 키드들에게는 애관이 존재하는 그 자체 만해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 양복, 드레스에 자리를 물려주다

 

극장 뒤 언덕에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이 예식장은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좀 폼나게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거의 신신예식장에서 치렀다. 이 예식장에는 정원이 딸려 있어 예식이 끝나면 이 야외마당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식장이 비어 있는 날짜에 맞춰 결혼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곳이다. 요즘 청첩장에서 신신예식장 활자를 본 지 오래됐다. 이름도 신신컨벤션웨딩홀로 바뀌었고 우아했던 그 모습도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사라지고 말았다.

 

신신의 명성은 시들해졌지만 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 숍이나 한복 그리고 사진관 등 결혼 관련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 부터는 아예 웨딩거리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번성했던 경동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상점은 양복점이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개의 양복점이 성업 중이었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 이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기성복에 밀리고 백화점에 밀린 것이다.

 

모퉁이 길에서 눈에 띠는 이수일양복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가롭게 TV를 보던 이수일(68) 사장에게 옛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다 잊혀진 이야기인데 뭘하면서 마득치 않은 눈치이다. 이것저것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그는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지. 이런 설 명절 때는 몇일 밤을 새워서 일하곤 했는데한때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은 적도 있었지.”

 

손님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이 가봉하는 날이란다. 가봉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이내 줄자를 목에 건 이 사장의 눈빛은 장인의 눈빛으로 변한다. 돌리고 재고 올리고.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통 치수를 쟀을까. 요즘 맞춤양복 한 벌 값은 대략 100만원선. 단골인 듯한 손님은 스스로 특이 체형이라면서 양복을 꼭 맞춰 입는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 제 아버님 치수 장부도 있을 겁니다.” 오래된 장부를 들춰보면 체형이 비슷한 부자(父子)들이 대를 이어 양복을 맞춰 입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 노란자위 뜬 쌍화차

 

차 한잔 권하는 이수일 사장에게 대신 이 동네에서 좀 오래된 다방을 알려달라고 하자 바로 양복점 옆 골목에 있는 학다방을 소개한다.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방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색깔 있는 어둔 조명 밑 탁자와 의자 등의 소품이 70년대 다방 분위기를 그대로 풍겼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섹소폰 소릴 들어보렴최백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침 비도 오겠다 도라지 위스키 대신 쌍화차를 한잔 시켰다. 잠시 후에 노란자위가 둥둥 뜬 쌍화차가 탁자에 놓였다. , 계란 띄운 쌍화차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약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줄을 길게 선다면 이해가 갈까. 그런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던 곳이 동서대약국과 싸리재약국이었다.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십수개의 개인병원이 함께 의료타운을 이룬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사람들이 시내를 방문한 차에 약을 박스나 봉지채로 사가곤 했다.

 

동서대약국의 간판에는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가 세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옆의 싸리재 약국은 경동 지역에서 싸리재라는 이름을 쓰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그렇게 싸리재는 잊혀져가고 있다.

 

다시 조명이 켜지다

 

싸리재하면 돌체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돌체는 최영준, 김성찬, 정주희 등 100여 명의 연극인들을 배출한 인천 연극의 산실이었다. 지난 197812월 얼음공장을 개조해 약 90석 정도 되는 객석과 무대공간을 만들어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연극뿐만 아니라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싱어롱의 무대도 겸했다.

 

극단마임 대표인 최규호 씨가 극단의 전용극장으로 활용하면서 지역 연극에 불씨를 키우기도 했다. 2007년 마임이 남구 문학동으로 이전하며 돌체극장은 한동안 조명이 꺼졌다.

 

그런 돌체가 최근 문화활동가이자 작가인 장한섬(36) 씨에 의해 플레이캠퍼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개관했다. 지난 연말에 크리스마스 트릭을 무대에 올려 돌체에 대한 향수를 지극하기도 했다. “지역 연극의 산실이 다시 명맥을 유지해나가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하는 장 대표는 한 극단의 전용극장이기 보다 인천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임을 내비친다. 그 일환으로 실버극단과 직장인 중심의 극단도 만들고 극장 옆에 비어진 공간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인문학카페를 운영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