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타임캡슐, 응봉산
인천타임캡슐, 응봉산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0-05-07 18:30:27
인천타임캡슐, 응봉산
응봉산은 갑문을 지나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선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을 정도로 아담하고 고즈넉한 인상 때문인지 개항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각국조계가 획정되고 외국인들만의 별천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여기저기에 다양한 근대문화의 잔상들이 스며있어 당시를 경험치 못했던 우리에게조차 그 역사적 흔적을 찾아 서성이게 하는 시공을 초월한 타임캡슐과 같은 공간이다.
글 강옥엽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중구와 동구를 남북으로 양분하면서 바다로 뻗어내린 구릉이 응봉산(鷹峰山)이다.『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에는 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개로 분류되어 있는 해발고도 69m의 응봉산은 그 모양이 ‘매[鷹]의 부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지만, 산의 모양이 실제로 매의 부리를 닮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산(山)을 뜻하는 순 우리말 ‘뫼’의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므로 응봉산은 이 매부리산이 한자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산을 뜻하는 우리말 ‘매’를 새 ‘매’로 잘못 알아 ‘응(鷹)’으로 옮기고, 여기에 봉우리의 ‘봉’자가 붙어 이뤄진 것이다.
응봉산은 한때 ‘약대이산’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1890년대 활동했던 성 루카병원 의사 랜디스의 의술과 인품을 칭송하여 당시 사람들이 약대인(藥大人)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확대되어 병원이 있던 응봉산 일대를 약대인과 동일시했던 까닭이다.
응봉산 일대를 통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다.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462만㎡의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었는데(1884), 그 위치는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이곳에 여러 개의 구역을 나눠 정리하면서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찐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을 조성했다(1888).
이 ‘Public Garden’이 각국인 공동의 휴식처로 기능하면서 우리에게는 넓은 범주의 응봉산이라는 이름보다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는 축소된 명칭으로 더 익숙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현 인천여상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공원인 동공원과 대비하여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광복이 되면서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을 맞아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봉산이 가진 다양한 근대문화의 잔상은 당시에 건립된 건물과 인물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의 맥아더 장군 동상 부근에 지어졌던 1883년 인천항에 진출한 세창양행 사원들의 사택에서는 한때 독일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 왕자가 주재한 파티가 열렸으며(1899.6), 응봉산 중턱에 마련된 각국인들의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에서는 영국영사 허버트 고페의 개회 연설과 미국공사 알렌 부인의 개회선언으로 건물신축 개관식이 거행되었다(1901. 6).
1982년 세워진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자리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출신 사업가 존 스톤의 여름별장(1905)은 자체 발전시설을 갖춘 것은 물론 각종 가구와 시설들을 중국, 독일, 영국으로부터 들여와 설치했는데, 그야말로 이국적인 모습에 인천항의 랜드 마크로 알려져 1930년대 인천각이라는 고급여관 겸 요정으로 유명했다.
응봉산 북서쪽에 위치했던 독일상인 파울바우만의 주택은 사이토(齋藤實)총독의 별장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소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등장했던 탓인지(?) 자신의 별장 바로 아래에 있던 청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내무대신이 되었지만 결국 급진파 군부 청년장교들에게 살해되었던 인물이다.
응봉산 마루에 있던 인천관측소는 원래 중구청 뒷길에 있던 수진여관에 임시 기상사무실을 두었다가 조선 황실의 땅 3만평의 부지로 신축 이전한 것이다. 헬리혜성도 관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910), 초기 소장을 지냈던 와다(和田雄治)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실측조사(1909)했던 인물이다.
한편, 응봉산 북동쪽 넓은 분지에 조성된 웃터골 운동장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울분을 운동을 통해 달랬던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특히, 인천의 기차 통학생들이 주축이 된 한용단(漢勇團)과 미두취인소 미신(米信)팀과의 야구경기는 한·일대항전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응봉산에서의 자취는 1919년 3·1운동과 연관되어 만국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기독교신자 300여명이 강제해산 당했던 사실(1919. 3. 9)과, 한성임시정부의 ‘13도 대표자 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홍진(洪震), 이규갑(李奎甲) 등이 중심이 된 한성임시정부는 그 수립을 위한 회의를 만국공원에서 개최했는데, 이에 따라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德), 기독교 대표 박용희(朴用熙), 장붕(張鵬), 유교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욱(李鍾郁) 등 20명에 달하는 각계의 대표들이 4월 23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의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오세창의 발기로 응봉산에 해방기념탑 건립을 준비했다거나(1945. 10), 6·25전쟁 후 충혼탑을 제막하고(1953. 6), 인천출신전몰장병 5백5위의 합동위령제를 개최하였던(1953. 11)데서 정신적 결속을 다지는 민중광장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오정(1960)과 석정루(1966), 자유의 종이 세워지고(1965. 8), 제1회 인천시민의 날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1965. 6), 어린이 헌장비(1971. 6)와 한미수교100주년기념비(1982. 5)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유산보호헌장비, 라이온스클럽기념비, 학도의용군기념비, 철도 및 세관용지비 등의 기념비와 지표석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응봉산은 인천항에서 일어났던 많은 역사적 사건과 그 부침(浮沈)을 지켜본 인천 역사 속 또 하나의 진산(鎭山)이라 할 것이다. 응봉산에 올라 역사를 찾는 시간여행을 한 경험이 없다면 이제라도 그 발견의 기쁨을 느껴보길 권한다